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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 타고 삼 만리
‘한국은 난민촌인가’라는 매우 신선한(적어도 내가 보기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한국의 난민촌적 성격을 추출해보겠다”는 저자의 매우 야심찬 기획과는 달리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듯 보인다. 물론 책의 분량이 170여페이지 남짓하는 문고판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책의 질적 수준이 조악한 저널리즘적 속성을 뛰어넘고 있지 못하고 현상에 대한 정확한 투사와 깊은 성찰이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작금의 시대에 있어 ‘한국의 난민촌적 성격을 추출해보자’는 저자의 기획은 매스 미디어의 마취봉에 휘둘려 온 나와 같은 감동없는 세대 -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시간조차도 또 다른 생산물의 소비를 위해 폐기해야하는 - 또한 자신의 정체성조차도 뿌리내리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전에 살고 있는 세대에게 반성적 물음을 던져주는 아주 멋진 기획이다.

저자는 우선 ‘난민’의 어휘에 대한 개념을 “한마디로 내전, 정치적 억압, 경제적 재난, 빈곤 등의 이유로 조국을 떠난 사람들” 더 나아가 “실체적, 정신적으로 조국을 상실한 사람들”로 규정한다. 저자는 ‘난민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물으면서 ‘난민 의식’을 살핀다. 저자는 ‘난민 의식’을 살피기 위해 두 가지 범주를 설정하는데, 인간의 의식을 살피는 데 실마리가 되는 시간과 공간이 그것이다.

저자는 난민의 시간 의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난민이 된다는 것은 자기 나라와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한다. 자기 나라와의 단절이지만 실은 ‘나라’와의 단절이다. 자기 나라와 단절되더라도 다른 나라와 새로운 연결을 맺는 이민은 엄밀한 의미에서 나라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난민이 된다는 것은 나라라는 것 자체와의 결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호적이니 국적이니 가족, 친척이니 하는 것들과의 외형적 단절은 물론 죽음의 문제와도 직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처절한 내면적 단절이다.」p.25.

또한 저자는 한국의 실체적 조국 상실로서의 일제 강점기의 난민 의식을 살펴보면서 빅터 프랭크가 경험한 아우슈비츠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저자는 일제 36년을 여러 측면에서 <죽음의 수용소>(빅터 프랭클)로부터 해석의 준거틀을 이끌어내면서 난만의 과거의 의미를 살아온 삶 전체가 증발한다는 곧 삶이 완벽하게 뿌리 뽑협다는 뜻으로 ‘뿌리없음’으로 규정하고, 난민의 미래란 불확정, 불안, 희망 없음, 절망 등으로 드러난다고 말하면서 난민의 미래의 의미를 ‘무(無)전망’이라고 규정한다.

「난민의 과거와 미래는 서로 만나려야 만날 수가 없다. 뿌리 없음으로서의 과거는 그 자체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현재와는 무관하다. 무(無)전망으로서의 미래도 현재와 절연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그것은 파편화된 시간성이자 구조적 시간 감각의 파괴이다.」p.27.

인간의 일차적인 공간 체험의 범위 또는 단위는 ‘자기 나라의 영토’이다. 풍토니 기질이니 하는 말은 바로 공간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인간의 공간 의식은 이미 성장하면서 체질화 된다. 그러나 난민의 공간 의식은 어떤가? 난민이 될 경우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원천으로서의 ‘국가’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는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

결국 어떤 사람이 난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던 삶의 의미망이 갈기갈기 찢긴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개개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원천으로서의 틀이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삶의 의미망이 바로 우리 삶의 공간인데 난민이 됨으로써 그는 무(無)공간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난민의 행동 양식과 한국인의 난민화, 대한민국의 난민촌화를 부추기는 요인을 분석한다.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책은 용두사미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며 필자의 직업을 재확인이라도 하듯 조악한 저널리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또한 주제의 검증 방식이 근거 없는 양비론 이상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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