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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진

 ‘감금’의 모티브를 가지고 온 작품들에서의 중심은 바로 ‘대화’다.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무위의 상태에 빠지기에 입을 열 수밖에 없어진다. 상대는 자신을 가둔 가해자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피해자일 수도, 혹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주인공 샤를르는 감금당한 주인공의 본분에 충실히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눈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혼잣말부터, 여간수이자 구원자인 발메르 부인과, 또 아파트에 사는 몇몇 사람들과, 파출부와, 집배원등과도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는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모두다 대화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만을 토로한다. 그들은 발메르 부인의 고양이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그와 ‘언어를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일 뿐이다.

샤를르는 ‘몸’이 감금당한 상태에서 ‘소통’마저 감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공평한 상황의 뒤에는 샤를르의 원죄(?)가 버티고 서있었다. 샤를르는 광고기획자이며, ‘그 어떤 물건이라도 그 누구에게든 사게 만들 자신’이 있었고 그 말은 소비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는 소비자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사물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더, 샤를르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첫 날부터 솔직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만들었던 광고의 수법과 다르지 않게 감언이설로 그녀를 속여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주길 기대했다. 

그가 결국 타인을 향해서도 솔직한 대화를 하게 된 날, 그녀는 곧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에 맞춰 그를 꺼내주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이제 일이 잘 해결되려는 그 순간 그는 뜻밖의 대화를 듣게 된다. 그것은 그를 잡아먹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발메르 부인과 한 흑인의 대화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애쓴다. 솔직함으로 인해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잊고, 그는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려 하고 사람들에게 아첨을 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흑인의 손을 피하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내리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가 아닌 양고기를 내왔을 뿐이다. 이 장면은 삼국지에서 여백사의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조조의 이야기와 닮은 부분이 있다. 결론은 매우 다르지만, 사실 결국은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한 희생이니 결국 마찬가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조금 더 솔직하게 말을 털어놓았다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는 결국 세상에 너무 익숙해졌으며 세련된 척 하는 거짓된 화술에 중독이 되어 있었다.

이 점에 대한 작가의 비판은 작품의 마지막 문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히 드러난다.

[신기한 일은, 사체를 부검한 법의학자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 사람의 사망은 추락에 따른 충격 때문이 아니라 나뭇가지에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 전구와 접촉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인간은 장식(裝飾)의 피해자로, 감전사한 것이었다]

샤를르는 온통 꾸며지고 치장된 대화를 사용해서 살아왔고, 결국은 그런 장식이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이다.

작품 속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인물들의 모습은 그러나 현실성이 없어서 내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마저 든다.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현실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여주는 바는 바로 현대인들의 의사소통의 단절과 이기주의일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예의를 배우고, 체면을 배웠다.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 상황에 맞게 너무 직설적이지 않고 완곡하게 말하는 법 따위를 말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오줌 누러 가.” 대신에 “화장실에 좀…….” 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이런 간단한 완곡 화법은 다른 중요한 사안에 있어서 의사소통에 있어서 혼란을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현대에 들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타인과의 관계와 의사소통을 위한)자기계발서가 주장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남녀관계에서 솔직히 바로 말하지 말고 상황에 대처하는 법,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직설적인 명령과 부탁 대신 그를 구슬리는 법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정말로 최선의 방법일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에둘러 가는 것이 분명 효과적일 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타자와 내가 똑같은 존재임을 인지하고, 스스로에게나 하는 혼잣말이 아닌 타자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대화를 하려고 시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은 참 오묘한 것이라서 말을 가지고 놀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결국 궤변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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