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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진
서론은 생략하고. 우리는 상황에 절대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큰 핵심이다. 상황에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그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도 소위 평정심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굉장히 그럴 듯 했다. 어떠한 사건을 보며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나는 것은 그 상황에 내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상황에 지배를 받으면서는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초연하게 자신의 마음을 행복한 상상으로 기분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있어도, 짓궂은 아이들이 가장 아끼던 새를 죽여버려도 언제나 슬픔에 감정을 맡기지 말고 행복할 수 있는 상상을 하라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내가 도저히 도울 수 없는 불의가 생겼을 때도 분노하지 않고 뭔가 좋은 생각을 하며 행복해하고, 또는 내가 직접 억울한 일을 당해도 행복해 하란 말인가. 복수도 하지 말라고 하니. 이 이기적인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조건이 붙는다. 내가 행복한 생각을 하게 되었으면 주위사람들에게도 그 행복을 뿌려주라는. 그래서 그들도 그 방법이 옳음을 깨닫게 만들어 주라는.

그러나 글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 내가 화를 내면 그들이 바뀌느냐고. 뒤집어서 말하자면 내가 행복해서 행복을 사람들에게 뿌려주면 정말 그들이 행복해지고, 또 그들도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점차 다들 깨닫고 다들 행복해질까? 그래서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솔로몬은 그렇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행복을 뿌려주면 사람들이 변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모두들 무시한다는 것일까? 원래 나쁜 것을 훨씬 빨리 배우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또 솔로몬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언제나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것이 그것이다. 천국의 딜레마와도 일치한다. -천국은 신적인 존재가 항상 행복함을 가능하게 해 준다손 칠 수라도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좌절을 하고 시련을 겪고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날 기쁜 일이 생기고 일이 잘 풀리고 몸이 가벼워질 때 행복을 느낀다. 아픔이 크고 좌절을 많이 하면 한 만큼 그 다음에 찾아오는 행복이 큰 것이다. 흔히 말하듯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단' 것이다.

언제나 행복하다면, 그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또 언제나 감사할 일만 찾는다는 것은 상황이나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무언가 불만이 있고, 잘못된 것에 대한 분노를 하고, 아픔을 이기고 싶을 때 우리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감사할 일을 찾아내고 행복해하는 것은 회피는 아닐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난 행복해' 라고 외친다고 진정 행복한 것일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최면을 걸게 된다면 그것이 진정 행복이고, 또 옳은 것일까?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을 보며 그들의 편에서 대신 변명을 해주고 넘어가면 그것은 비겁함이 아닐까.

비관론자보다 언제나 낙관론자가 좋다. 우리가 흔히 예를 드는 '물이 반이나 남았네.'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의 차이는 분명하다. 마인드 컨트롤. 필요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오버했다.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행복의 밸브를 열어둘 수 없으며, 자주 쓰러지고, 사람관계에서도 상처를 자주 받는 나약한 존재다. 그러나 그런 나약함이 있고 시련이 있기에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수영장의 바닥을 짚어야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행복할 수 있는, 언제나 행복한 사람은 바보다. 이래도 행복하고, 저래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혐오해보기도 하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앉아 있기보다는 자주 쓰러지더라도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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