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지 않은 향수.
엘진 2003/08/18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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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인해 프랑스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선천적으로 몽매한 나조차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많은 프랑스소설은 죽음에 닿아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의 문학은 죽음을 외면할 것이며, 어느 문화의 삶 저 뒤편에 죽음이 숨어있지 않겠느냐만은 내가 접한 프랑스 소설은 그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엠므씨의 마지막 향수 역시 그랬다. 사실 작가인 퍼시 캉프는 영국인이지만 불어로 이 책이 쓰여졌다는 점에서 이 글은 불어권의 문화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죽음' 하면 쉽게 떠오르는 그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분명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고 능청스럽게 풀어나가고 있다. 또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마지막순간까지 죽음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도 아니다.
이야기는 단순한 플롯으로 특별한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하지도 않으며(60대 고령의 엠므씨가 주인공이다), 기발한 착상으로 넘치지도 않는다. 그저 터무니없이 바보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향수하나 때문에 자신감 넘치고 즐겁던 한 남자가 자살을 하다니-이 말 안에는 모든 줄거리가 압축되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엠므씨의 마지막 향수는 재미있다. 그것은 지은이 퍼시 캉프의 글솜씨와 묘사력에 기인한다. 그는 글을 즐겁게 쓴다.
물론 그가 타자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는 거짓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싱긋 미소를 띄우고 타자기 앞에 앉은 모습이 상상된다. 그는 능청스럽고 재치 있는 문체를 사용한 이 바보 같은 이야기 속의 진지함으로 엠므씨를 현실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소재의 현실감이란. 이 말은 말 자체로 모순이지만 소설 속에서 사실이다. 엠므씨가 향수에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종류의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적어도 그런 경험이 한 번 쯤 있기는 할 것이다. 작게 말하자면 어떤 징크스 같은…….
엠므씨는 향수 때문에 자살한 남자이긴 하지만-사실 어이가 없는!- 그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엠므씨는 기존의 머스크를 구하고, 그것의 양과 그가 평균연령까지 살아가면서 필요한 머스크의 양을 치밀하게 계산했으며-방울단위까지- 결국 죽음을 선택했을 때에도 그는 필요이상으로 슬퍼하지 않았다. 아니 슬픔의 정서는 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묘지에 비석대신 자신의 와상을 만들며, 남게될 집을 맘에 드는 사람에게 넘기려고 하며, 목을 매다는 순간까지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조금 더 완벽하게 비춰지질 기대한다. 그 부질없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강박증역시 우리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가 미리 예약해둔 안마사는 그의 죽음을 발견하고는 엠므씨의 깔끔한 뒤처리에 감탄하며 열심히 시체를 안마한다. 이것은 퍼시 캉프가 느낀 이 시대의 개인주의에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들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상대방을 배려한다. 그러나 죽음으로까지 상대방을 몰고 간 어떠한 것에 대한 관심을 전혀 배제하고 단지 그가 원한대로 시체를 안마하며, 그의 씀씀이에 만족하는 안마사의 이야기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두절을 나타내고 있다.
더 이상은 글을 진행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불행히도 이 글을 접한 사람들은 <엠므씨의 마지막향수>라는 흥미로운 책을 자신만의 색으로 읽는데 지장을 받을 수도 있으니. 분명 내가 전혀 생각도 못한 많은 부분들을 다른 독자들이 찾아낼 수 있을텐데 말이다. 엠므씨이야기는 주제의 강요 없이 당신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이다. 라는 것으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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