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훔치기
엘진 2002/06/0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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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훔치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다. 아름다움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훔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칼은 여기에서 또 한번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했으며,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그 부동의 것을 훔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도 정말 '있을법하도록'. 이것이 바로 그의 작가적 역량이 아닌가 싶다.
아름다움에 대해 누구나 잠깐은 생각해봤을만 한 그 파괴력과, 완벽함으로 인해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힘. 그는 그것을 좀 더 깊이 있는 글로 표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그 이후 이 책의 후유증기간을 거치는 동안 두려웠다. 그것은 물론 나도 감금당한 그녀들처럼 누군가로 인해 감금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나르시즘적 두려움은 아니었다.
'스무 살의 아름다움은 자명한 거야. 서른 살의 아름다움은 보상이고 쉰 살의 아름다움은 기적이지.' 소설속 프란체스카가 한 말이다. 나도 지금 20대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것이나, 곧 30대가 될 것이고, 50대가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아름다움은 기적이 될 것이며 난 아마도 프란체스카처럼 갓 20살의 싱싱한 아름다움을 증오하고 질투하게 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 날 타인의 아름다움을 훔치려 들지는 않을까? 날 분노하게 만든 잔혹한 삼인방의 의견에 동조를 보내지 않을까?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며, 이기적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를 하고, 부당하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단지 아름다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그것이-분노하고 나눠갖는 것-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관조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 마음을 가다듬고 비워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또 반문을 하자면, 그것은 옳은 것일까? 우리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싶어하므로 점점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타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만족해버린다면 우리 자신은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다. 타인의 지식을 보고 그저 경탄하고 안주해버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많은 것을 알 수 없으며, 장미의 이름과 죄와 벌, 향수를 읽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의 소설을 읽기 힘들어질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잠깐 작가의 의도를 다시 짐작해본다. 그는 단지 잔혹성과, 소설적 상상, 자극적인 소재와 유희만을 전달하기보다는 좀 더 철학적인 주제를 담으려 한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이 책에는 작가의 말이없다. 그것은 우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반면 나처럼 수다스러운 독자로 하여금 좀 더 많은 부분을 상상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그것에 힘을입어 감히 말하건대 그는 중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에 대한-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해서도-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으나 적당량을 취하라는. 정신과 인턴 마틸드의 결말부분에서도 드러난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하자면 난 이런 식의 환상적이고, 현실에서 체험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즐기는 편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소설을 읽는 원초적인 이유. 등에 대해 나불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적어도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것은 소설이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의 재미와, 소설 속의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은 현실과는 다르다. 아무리 리얼리즘 적인 소설도 역시 현실과 다르다. 내가 보는 소설의 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실 속에서 머무는듯 하다가 어느 순간 현실에서 비틀려있고, 뛰쳐나가 있는 부분. 그것과 현실과의 교묘한 연관. 소설을 읽다가 그 잔혹성과, 몽롱함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때엔 그저 고개를 들고 거울을 쳐다보는 것으로 해결되는. 그 소설의 미학이 파스칼의 소설에는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어쩌면 환상을 관조함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또 다른 훔치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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