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영화를 본다는 것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영화 에세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라는 소개 문구가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압축한다. 강정은 1992년 등단 이래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온 시인이다. 록밴드 '엘리펀트 슬리브'의 보컬이기도 하고, 연극 무대까지 넘나든 이 경계 없는 예술가가 이번엔 영화 에세이를 냈다. 244쪽의 이 책은, 영화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저자는, 세상의 빛보다 어둠에서 더 선명하게 타오르는 영화들의 초상을 에세이로 써 내려간다. 영화가 남긴 진동과 침묵을 붙잡는 저자에게 영화의 모든 장면은 몸으로 기록된다. 꿈처럼, 혹은 고백처럼. 그에게 영화란 체험에 가깝다.
스크린 앞에 앉아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잔상과 진동을 언어로 옮겨 적은 것이 이 책이다. 영화 '비평'도 아니고, 영화 '소개'도 아니다. 시인이 영화를 통과한 흔적, 그 체험의 기록이다. 강정의 글은 영화 앞에서 분석자의 자리가 아니라 목격자의 자리에 선다. 그 차이가 이 책을 여타의 영화 에세이와 다르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이 책이 다루는 영화들의 목록을 보면 강정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단번에 선명해진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시작으로, 줄랍스키의 〈포제션〉,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비롯해 유럽과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 그리고 한국 영화 〈발레리나〉를 거쳐 마침내 〈조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선택한 영화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어둠의 이야기들이다.
〈포제션〉의 안제이 줄랍스키, 〈홀리 모터스〉의 레오 카락스, 〈거울〉의 타르코프스키. 이들은 모두 불편하고 낯설고 보기 쉽지 않은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다. 강정은 이 어둡고 거친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고른다. 그 의도는 단순한 취향의 표명이 아니다.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을 상기"하며 그 어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상처, 욕망, 구원, 사랑을 시인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다. 여기서 '어둠'은 단순히 암울하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으로 정의하는 저자에게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암흑을 넘어서 현실이 감추고 있는 것, 진짜 현실을 숨기고 있는 베일이며, 영화는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본다.
어둠이 없으면 영화도 없다. 스크린의 빛은 언제나 어둠을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극장의 암전, 필름의 공백,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어둠 — 강정은 이 물리적 사실을 영화 미학의 핵심으로 끌어올린다. 빛을 말하기 위해 어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논리다.
책에 수록된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킬러, 조커, 괴물, 혁명가, 정신병자다. 이들은 사회의 정상 테두리 밖에 있거나, 그 테두리 자체의 모순을 폭로한다. 강정이 이 인물들에게 매혹되는 것은,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가장 정면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정상성 바깥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정상성 안에 갇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거울 앞에 선 관객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거울'이다. 강정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에서 길어올린 이 이미지는 책 전체를 지배하는 메타포가 된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저자는 "거울은 고요한 평면이나 그 안엔 온갖 시간과 사물과 사람의 잔영들로 요란스럽다. '사랑'을 비추면 '증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슬픔'을 던지면 '욕망'이 반사되기도 한다"고 기록했다. 저자는 영화 자체를 거울로 본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영화를 거울로 보는 시선은,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예술 감상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락으로서의 영화 앞에서 관객은 편안하게 수용하는 쪽에 선다. 거울로서의 영화 앞에서 관객은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거울 앞에 서면 나를 보게 된다. 강정에게 영화 보기는 그래서 하나의 자기 대면이다. 독자는 어느 순간, 스크린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강정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영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이 단순한 영화 감상문과 구별되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다. 영화에 대한 글이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글이고, 더 좁혀 말하면 나에 대한 글이다.
조커라는 핵심, 그리고 질문
이 책의 심장부는 〈조커〉와 〈조커: 폴리 아 되〉를 다룬 두 편의 글이다. 강정은 이 두 편에서 책 전체의 논지를 가장 날카롭게 벼린다.
조커는 "사회적 인습 바깥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인습과 규율 및 편견 등을 뒤엎는 예상치 못한 대중적 역린"이다.
조커는 '나쁜 놈'이 아니다. 혹은 단순히 나쁜 놈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자, 우리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강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관객을 향해 직접 질문을 겨냥한다.
"거기, 판결의 총신을 겨누며 슬며시 웃거나 화내고 있는 자, 당신 또한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것은 도발이 아니라 진지한 물음이다. 우리가 스크린 위의 조커를 보며 공감하거나 두려워한다면, 그 공감과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의 무언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내부의 무언가를 건드린 반응이 아닌가.
일관된 주제를 반복하면서 명확해지는 것은 "영화 자체가 조커"라는 저자의 깨우침이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고, 허구로 현실을 뒤바꾸며, 스스로 가면을 쓴다.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지배한다.
영화가 조커라는 명제는 이 책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동시에 가장 설득력 있는 통찰이다. 영화는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조금씩 재구성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의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강정은 이 역설을 시인의 언어로 날카롭게 포착한다.
더 나아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 스크린 안과 밖의 경계가 흐릿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의 마지막 울림이다.
음악과 자본주의, 이기 팝과 자무시
이 책은 순수한 영화 미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강정이 뮤지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이 책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펑크록 대부 이기 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짐 자무시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새로운 각으로 예리하게 설파하기도 한다.
이기 팝은 주류 바깥에서 스스로를 태워온 예술가다. 자무시는 그런 이기 팝의 삶을 카메라로 응시한 감독이다. 강정이 이 교차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읽는 방식은, 영화와 음악과 사회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얽히는 강정 특유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어느 챕터에서도 강정의 글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그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끝난다.
'죽지 않는 시인'의 의미
책 제목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는 여러 겹으로 읽힌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죽는다. 조커도, 〈포제션〉의 인물들도, 〈발레리나〉의 킬러도. 그러나 그들이 필름 위에 새겨진 이미지는 죽지 않는다. 상영이 끝나도, 극장 불이 켜져도, 그 잔상은 관객의 몸 어딘가에 남아 계속 진동한다.
"영화는 망상의 거울이고, 그 거울은 결국 나 자신이다"라고 정의하는 필자는 스크린 위 죽지 않는 영혼들의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책 곳곳에 투시하고 있다. khan
죽지 않는 시인은 강정 자신이기도 하다. 글이 살아 있는 한, 시인도 살아 있다. 강정은 영화를 씀으로써 자신을 쓴다. 이 책은 영화 에세이의 형식을 빌린 시인의 자화상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 존재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로 붙잡으려는 한 시인의 치열한 작업이다.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는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광과 여운, 그 흔적이 한 편의 시처럼 놓여있다. 영화를 사랑하되 그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싶은 독자, 시인의 언어로 영화를 읽는 경험을 원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오래 남는 책이 될 것이다. 읽고 나면 영화관 불이 꺼지는 순간, 이제 조금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