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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의 일기장


봉준호 감독은 이 책을 추천하며 '시네필의 일기장'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책을 정확하게 해석해준다. 한상훈은 30여 년간 극장을 제집 드나들듯 다닌 인물이다. 영화계 종사자도 아니고, 비평으로 밥을 먹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영화가 좋아서, 극장이 없으면 살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에게 극장은 직장이 아니라 집이었다. 살아가는 이유였고, 버텨내는 방식이었다. 이 책은 그 30년의 흔적이다. 


책은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된다. 1부 「극장전」, 2부 「미치광이 같은 사랑」, 3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4부 「어느 가족」이 그것이다. 각 파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저자의 삶이 맞닿는 지점을 기록한다. 학술적 분석도 아니고, 세련된 영화 에세이도 아니다. 저자는 이를 일기 같은 문체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왜 우리는 영화를 보는가, 영화의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1부 「극장전」 극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1부는 말 그대로 극장을 무대로 한 사건과 감정의 기록이다. 제목들이 이미 흥미롭다. '어느 걸작주의자의 강박증', '눈물이 주룩주룩 나, 스코티 그리고 매들린', '영화광은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는가'. 이 소제목들에서 이미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걸작에 집착하고, 히치콕의 〈현기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영화에 피를 빨린다.


1부에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다. 홍상수, 나루세 미키오, 존 포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홍상수 감독과의 우연한 조우, 류이치 사카모토를 찾아서,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조언, 박찬욱 감독과의 인연 같은 챕터들이다. 세계적인 감독들과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마주치는 이 일화들은 저자가 극장을 얼마나 집요하게 다녔는지를 방증한다. 극장에 항상 있었으니까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에피소드들의 진짜 의미다. 


'할머니와 〈미나리〉' 챕터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를 가족과 함께 보는 경험이 어떻게 전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는지를, 저자 특유의 솔직한 문체로 담아낸다. 이 1부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강박'에 가깝다. 좋은 영화를 봐야 한다는 강박, 좋아하는 감독을 한 번이라도 봐야 한다는 강박. 그가 남긴 글에는 멋진 미사여구가 없다. 때로는 너무 솔직하고, 때로는 벅차게 무너진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이 파트를 읽히게 만든다.


2부 「미치광이 같은 사랑」 영화와 자신을 동일시하다


2부는 저자가 가장 깊이 사랑하는 영화들에 대한 글을 모았다. 특히 저자가 자신과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히치콕의 〈현기증〉과 주인공 '스코티', 그리고 저자의 인생 영화인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저자의 삶으로 분석된다. 


〈현기증〉을 다룬 챕터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영원히 헤매다'는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글 중 하나다. 저자는 히치콕의 주인공 스코티가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그 환상을 쫓는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겹쳐 읽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 스크린 속 인물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 이것이 저자에게 영화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핵심 장면이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다룬 '간절한 기도'는 또 다른 결이다. 핵전쟁의 공포 앞에서 한 남자가 신과 거래를 하는 이 영화를, 저자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절망과 연결 짓는다. 영화가 어떻게 삶의 어떤 감각을 대신 표현해주는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나루세 미키오를 다룬 '흐르는 강물처럼',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다룬 '진실과 마주하는 법', 후侯孝賢(허우 샤오시엔)의 〈안녕, 용문객잔〉을 다룬 '극장의 유령',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기생충〉까지를 아우르는 '내 기억 속의 영화 음악들'까지 이어지는 2부는, 저자의 시네필리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일본 고전 영화의 정서, 타이완 뉴웨이브의 공간감, 러시아 영화의 영성, 헐리우드의 자기고백 — 이 모든 것을 저자는 자신의 삶으로 흡수해 다시 언어로 내놓는다. 


3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떠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3부는 추모의 글들이다. 근래 세상을 떠난 배우들과 감독을 위한 추모의 글로 채웠다. 알랭 들롱, 지나 롤랜즈 등 기라성 같은 배우와 오시마 나기사, 데이빗 린치 같은 독보적인 감독들을 위한 존경과 감사를 담았다. 


오시마 나기사를 추모하는 '영원히 젊은 영화를 만든 거장', 장 폴 벨몽도를 기리는 '내 기억 속에 〈네 멋대로 해라〉로 박제된 배우',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바치는 '포에버 시네마 천국',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와 함께 지나 롤랜즈를 추모하는 글, 알랭 들롱을 향한 '그는 시네마였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를 추모하는 '〈스트레이트 스토리〉, 나 그리고 어머니'까지, 추모의 대상은 다양하지만 글의 온도는 한결같다. 


이 챕터들에서 주목할 것은 추모와 더불어 저자의 삶을 꺼낸다는 점이다. 데이빗 린치를 추모하는 글에 어머니가 등장하고, 장 폴 벨몽도에 대한 글에 저자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진다. 추모는 결국 기억이고, 기억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다. 이 파트를 통해 저자는 영화와 삶이 얼마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지를, 간접적이지만 가장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4부 「어느 가족」 책의 심장

가장 밀도 있고 저자의 진솔함이 묻어나는 4부는, 영화를 주제로 삼은 글 중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큼 독자의 심금을 울릴 만한 글을 모았다. 이 파트가 이 책의 진짜 핵심이다. 

영화와 저자의 삶이 가족사 안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 평생 소원했던 아버지와의 첫 화해,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순간마저 영화로 기록되는 놀라운 광경, 그리운 어머니와의 애틋한 사연도 영화와 함께 펼쳐진다. 


'아버지와의 첫 포옹' — 이 챕터 제목만으로도 이미 무언가가 밀려온다. 평생 어색하고 먼 관계였던 아버지와,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처음으로 무언가 닿는 순간을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한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어머니의 16mm 필름'은 떠나보냄의 슬픔을 필름과 이미지의 언어로 풀어낸다.

영화 〈벌새〉를 통해 청년기를 다시 바라본 이야기도 실렸다. '02호에 살았던 내가 1002호에 살았던 은희에게'라는 긴 제목의 이 챕터에서, 저자는 〈벌새〉의 주인공 은희를 통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환한다. 영화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해주는 그 경험 — 이것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감각이다. 


4부에서 이 책은 단순한 영화 에세이를 넘어선다. 영화가 어떻게 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삶 속으로 들어와 상처를 보여주고, 화해를 이끌고, 이별을 견디게 해주는지를 — 이론이 아니라 실제 경험으로 — 써내려간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이 책은 '시네필의 일기장'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 적잖게 담겨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강점이다. 영화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을 기대한다면 다소 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영화와 맺어온 30년의 관계를, 이렇게 날것 그대로 담아낸 책은 흔치 않다. 


그는 스크린 속 땀과 고통을 자신의 삶에 포개어 읽었고, 그렇게 체화된 고통과 숨결은 그의 문장 속에 차분히 각인되어 있다. "영화가 삶을 바꿨다"는 익숙한 말보다, "삶이 끝까지 영화를 놓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더 어울리는 사람. 


시네필이라면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할 만큼 솔직한 책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정도의 독자라면, 한 인간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책이다. 어느 쪽이든, 읽고 나면 극장에 가고 싶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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