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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저자의 『뱀파이어, 이미지에 관한 생각』(불란서책방, 2024)은 뱀파이어와 영화가 '이중적 질료성'이라는 공통 속성을 지닌다는 독창적 시각으로, 공포와 매혹의 존재인 뱀파이어를 통해 영화 이미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합니다. 


"이중적 질료성"은 김성태의 책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쉽게 말하면, 뱀파이어와 영화는 둘 다 "실체가 없지만, 특정 조건을 만나면 잠깐 존재를 얻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뱀파이어는 낮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밤이 되면 육체를 입고 나타납니다. 영화 속 인물은 현실에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스크린에 투영되는 순간 관객은 그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둘 다 "허구 속 존재"이면서, 특정 조건(밤/스크린)을 만나야만 비로소 질료, 즉 몸·실체를 얻는다는 점이 같습니다. 이게 바로 이중적 질료성의 핵심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관객과 뱀파이어의 관계를 "흡혈"에 빗댑니다. 뱀파이어가 인간을 자신의 최면 속으로 끌어들이듯, 영화도 관객을 스크린 앞에 붙들고 현실감을 이식합니다. 


그래서 "뱀파이어는 영화 자체이고, 관객은 흡혈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


이중적 질료성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개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꽤 정교한 '존재론적' '주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 질료(質料)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형상을 받아들이는 재료"를 뜻합니다. 조각상으로 치면 대리석이 질료이고, 그 돌에 새겨진 형태가 형상(形相)입니다. 그런데 뱀파이어와 영화는 질료가 두 겹으로 작동합니다. 


평소에는 질료가 없는 순수한 관념(이야기, 이미지)으로 존재하다가, 특수한 조건이 주어지면 일시적으로 질료를 얻어 현실에 침투합니다. 이 "이중성"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핵심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침투가 완전한 현실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고, 햇빛을 받으면 사라집니다. 영화 속 인물은 관객이 극장을 나서는 순간 다시 스크린 안으로 돌아갑니다. 둘 다 현실을 넘나들되, 결코 완전히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경계에 머무는 존재"라는 특성이 두 존재를 더욱 묶어 줍니다.


또한 저자는 "매혹"이라는 공통점도 강조합니다. 뱀파이어는 공포스럽지만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은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울고, 웃고, 공포에 떱니다. 이 "알면서도 속는" 자발적 취약성이 흡혈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입니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론입니다. 뱀파이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왜 어두운 극장에 앉아 낯선 이야기에 감정을 내어주는지, 왜 허구인 줄 알면서도 스크린 앞에서 무력해지는지 — 그 불가사의한 경험의 구조를 "뱀파이어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은 이미 한 번씩 뱀파이어에게 목을 내어준 셈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기꺼이 극장에 앉는다는 사실이, 그 흡혈이 결코 불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대부(大部)로 나뉘며, 그 앞에 짧은 서문 격의 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체 312쪽의 분량 안에서, 저자는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는 1부에서 출발하여 뱀파이어-영화라는 등식을 다양한 작품에 적용하는 2부로 넘어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책은 "건너기 전의 다리 이 편에서"라는 제목의 서두로 시작합니다.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한데, 저자가 앞으로 펼쳐갈 논의 전체를 "경계를 건너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듯, 이 책 자체도 공포 문화사와 영화 철학 사이의 경계 위에 서 있음을 처음부터 예고합니다.

1부: 드라쿨레아에서 노스페라투로

1부는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 역사적·문화적 탐구입니다. 저자는 19세기와 20세기를 각각 하나의 장으로 나눠 다룹니다.

첫 번째 장에서는 뱀파이어 이미지의 기원을 중세 유럽의 공포 문화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합니다. 악과 마법, 마녀, 흑사병, 십자군 전쟁 등 중세인들의 실존적 공포가 어떻게 뱀파이어라는 형상 안에 응결되었는지를 설명하며, 특히 블라드 3세(Vlad the Dragon), 즉 역사 속 실존 인물 드라쿨 3세가 뱀파이어 신화의 토대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신의 침묵 앞에서 생겨난 공백, 페스트가 만들어낸 죽음에 대한 공포가 뱀파이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필요로 했다는 논지는 단순한 괴물 기원론이 아니라 일종의 문명 공포사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 장은 이 공포의 형상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다룹니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 속 드라큘라가 런던으로 '건너오는' 장면을 분기점으로 삼아, 뱀파이어가 근대 도시 문명 속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이어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1922)와 〈파우스트〉를 경유하면서, 뱀파이어가 영화라는 매체를 만나 어떻게 새롭게 변형·재탄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최면 이미지의 힘"을 다루는 소절은 이중적 질료성 개념의 직접적인 서막으로, 카메라 앞에 선 이미지가 관객을 최면 상태로 이끄는 구조를 뱀파이어의 흡혈 행위와 겹쳐 읽습니다.

2부: 어지러진 사건의 지평선

2부는 더욱 자유롭고 넓게 펼쳐집니다.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물리학적 개념, 즉 블랙홀의 경계면으로부터 은유를 빌려, 저자는 뱀파이어-영화의 속성이 구현된 다양한 영화 작품들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각 소절은 사실상 개별 영화론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거론되는 작품들이 흥미롭습니다.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라 안토니오니의 〈Blow-Up〉,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을 연상케 하는 노스트로모(우주선 이름)가 등장합니다.

저자는 이 작품들에서 뱀파이어적인 것을 찾아냅니다. 〈Blow-Up〉에서는 스크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공(Ball), 즉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사물을 뱀파이어적 허구성의 사례로 읽고,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에서는 과거가 현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초시간적 공포를 분석합니다. "나포당함, 끌려감"이라는 소절 제목은 영화 관람의 경험 자체를 뱀파이어에게 붙들리는 감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앞서 다룬 이중적 질료성 개념이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검증되는 부분입니다.

2부의 마지막은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 시리즈와 영화 일반을 직접 등치시키는 논의로 마무리됩니다. 마부제는 변신과 최면, 타인에 대한 지배를 능력으로 삼는 악당인데, 저자는 그가 뱀파이어-영화의 속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라고 봅니다. 영화 관객은 마부제의 피지배자이자, 스크린 앞의 흡혈 대상이라는 논지가 여기서 완성됩니다.

정리하자면, 1부에서 뱀파이어가 어떤 문화적 필요에 의해 태어났는지를 밝힌 뒤, 2부에서는 그 뱀파이어성이 영화라는 장치 안에서 어떻게 반복·심화되는지를 개별 작품들을 통해 입증합니다. 단순히 뱀파이어가 많이 나오는 영화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를 흡혈의 구조로 해석하는 영화 존재론에 가까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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