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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8830년 브롱쿠르 성의 하녀 마리안느 미셸과 성주의 아들 로랑 드마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성주 조부모 밑에서 자라 사랑받으며 계몽주의 교육을 받고 독학으로 교사가 되었습니다. 세간에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두 분은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이였다. 


나는 모든 종류의 글을 썼다. 시, 동화, 희곡, 소설 등. 1850년 빅토르 위고에게 내 첫 시를 보낸 이후 그가 죽기 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내 편지의 서명은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등장 인물 앙졸라였다. 1851년 드디어 나는 파리에서 빅토르 위고를 만난다.


1852년 나는 교사가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 3세 제정에서는 교사들의 충성서약을 의무화했지만 나는 서약을 거부하고 내 스스로 학교를 세워서 당시엔 금지되었던 라 마르세이예즈를 아이들과 함께 불렀고 세속교육과 남녀 평등을 가르친다.


나의 목표는 아이들 사이에서 인간성과 정의의 원칙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1890년 런던에 망명하는 동안에도 국제자유학교를 세워 기능, 예술과 과학 과정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혁신적 교육을 펼쳤다.


1856년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나의 영혼의 동반자 테오필 페레를 만난다. 그는 파리 코뮌 탄압 이후 2만 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총살 당했다. 테오를 체포할 때, 그들은 나의 친구 병약한 마리를 그녀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끌고 나갔다. 어머니에게 딸을 살리려면 아들의 이름을 대라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무의식 중에 몇 마디를 밷었다..그렇게 체포되었고 어머니는 몇 주후 완전히 실성하여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사회 정의, 일자리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교육을 위해 싸웠다. 장 조레스는 나를 세속의 성녀라 불렀다. 무엇보다 나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나는 여성이었고 여성으로 말해야만 했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는 바리케이드에서 무기를 들고 싸웠고 부상자들과 여성과 아이들을 돌봤다.  파리 코뮌 실패 이후 정부는 나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어머니를 베르샤유 감옥에 가두었다. 나는 내 생명같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자수했다. 어머니는 한사코 감옥에서 나가길 거부했지만 오랫동안 설득했고 어머니는 결국 내 말을 들어주었다. 


파리 코뮌 군사법정은 한 마디로 나에게 전장이었다. 나는 마치 총을 쏘듯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했고 그들 앞에서 당당했다. 나는 사형을 원했고, 겁장이들인 당신들이 나를 사형시키지 않으면 복수하겠다고 했다. 빅토르 위고는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위한 시를 남겼다. 남자보다 위대한.


결국 나는 사형 대신 누벨칼레도니 유배형이 선고되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다른 유형수들과는 달리 원주민과 우정을 쌓고 그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웠고 또 책으로 엮었으며 반제국주의자로서 원주민 봉기를 지지했다. 당시 대부분의 유형수들은 원주민 봉기 탄압에 동조했었다. 


​187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수천 명의 인파가 역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아나키스트로서 이후 수많은 강연에 참여한다. 


1883년 엥발리드 실업자 시위에 이은 빵폭동 주도 혐의로 수감된다. 세 곳의 빵집을 약탈했다는 혐의다. 정부와 언론의 비열한 수작은 끝이 없었다.   


폴 베를렌느는 이에 분개해서 나를 위한 시를 남겼다. 각 구절의 마지막은 '루이즈 미셸은 좋은 사람'이었다.


1886년 석방되었고 여전히 강연과 투쟁을 지속했다.


1880년 르 아브르에서 브르타뉴 지방의 한 남자로부터 권총 테러를 당해 머리에 총알 한 발이 박혔다. 나는 이걸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빼내는 건 너무 위험했다. 나는 이걸 훈장처럼 여겼다. 물론 나머지 17년 동안 고통스러웠다. 나는 내게 총을 쏜 자를 용서했다. 그가 감옥에 가지 않게 하려고 백방으로 뛰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이렇게 만든 사회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을 돌보기 위해 모금도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결혼 제도에 반대한다. 성매매와 결혼은 본질상 다르지 않은 거래관계라고 파악했다. 성매매에 강하게 반대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회 문제를 구조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경제적 불평등, 범죄, 빈곤을 개인의 잘못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았으며, 사회적 억압이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1905년 알제리 강연을 다녀오고 폐렴 치료를 위해 마르세이유 요양중 생을 마감한다. 


내 장례식엔 경찰만 1만명이 동원되었다. 운집한 군중은 2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나의 마지막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내 이름이 붙은 파리 지하철 역이 있다. 단독으로 지하철 명으로 여성의 이름이 붙은 유일한 사례다. 그리고 전국에 수백개의 학교, 거리,문화센터, 공원, 광장에 내 이름이 붙어있다. 


나의 삶은 고단했으나 나는 한번도 고단함을 느끼지 않았다. 나의 삶은 언제나 약자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상황들에서도 나는 언제나 희망을 보았다. 삶을 누렸다. 미래는 결국 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 해야할 것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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