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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모신 하미드가 파키스탄 출신이어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라는 제목을 읽으면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지를지 말지 주저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 소설이 처음에 다루는 근본주의자는 이슬람교와 상관이 없다. 찬게즈는 파키스탄 출신으로 프리스턴 대학의 모든 수업에서 A학점 이상만 받고 졸업한 수재이다. 그는 뉴욕의 언더우드 샘슨이라는 감정회사에 분석가로 취업한다.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언더우드 샘슨의 제1원칙이다. 근본적인 것은 숫자로 표현된다. 분석가 찬게즈는 컨설팅을 요청한 회사의 자잘한 것들, “지방질”을 제거해서 건전한 재정상태를 도모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인원을 감축하고 불필요한 사업은 정리하거나 다른 회사에 외주를 준다. 찬게즈와 동료들은 미국 여러 지역뿐만 아니라 필리핀, 칠레 등 다양한 국가에 있는 회사를 분석하고 컨설팅해준다.
전무이사 짐은 채용 면접 자리에서 찬게즈의 굶주린 모습에 좋은 점수를 줘 채용을 결정한다. 찬게즈는 왜 굶주렸는가? 파키스탄에 있는 찬게즈의 집안은 대대로 전문직에 종사한 괜찮은 집안이었다. 하지만 전문직 종사자의 수입이 과거와 달리 시원찮아 졌고 과거의 영광은 상인 계급에 내줬다. 찬게즈는 아직 가난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부자도 아닌 “문턱”에 걸쳐 있는 형편이다. 언더우드 샘슨은 신입사원에게 8만 달러의 연봉을 약속한다. 전무이사 짐은 자신도 젊은 시절 가난을 겪었기에 찬게즈의 굶주림을 알아본다. 문턱 이쪽에 있다가 저쪽으로 넘어간다는 비유는 소설 속 다른 장면들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찬게즈는 언더우드 샘슨에 채용이 확정된 후 프리스턴 동창들과 떠난 여행에서 에리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에리카는 다른 사람들을 제쳐두고 찬게즈에게 마음을 열지만 몇 년 전에 죽은 첫사랑 크리스를 잊지 못한다. 크리스는 에리카가 내면에서 만날 수 있는 과거이고, 찬게즈는 에리카가 바깥에서 마주치는 현재이다. 찬게즈에게 상류층 백인 에리카와의 사랑은 그의 가치를 보증해준다. 언더우드 샘슨의 신입사원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기에 별문제가 없었다면 회사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에리카와의 관계도 잘 진전되었을지도 모른다. 찬게즈는 필리핀의 음반회사를 평가하러 떠난 출장지에서 9.11 테러 소식을 듣는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는 과거로 회귀한다. 귀국길에 오른 찬게즈는 외국인 심사대에서 추가 심사를 받아야 해서 동료들과 따로 귀가한다. 찬게즈는 그동안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져도 언더우드 샘슨의 분석가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미국인처럼 행동해왔는데 9.11 테러 이후엔 주변의 편견 어린 시선 때문에 이슬람이라는 정체성에 묶이게 된다. 9.11 테러 이후 뉴욕은 코즈모폴리턴적인 분위기가 사라졌고, 미국과 이슬람은 다른 “부족”이 되었다. 미군의 중동 주둔 이후 파키스탄은 인도와 긴장 관계가 심해진다. 찬게즈는 가족들이 걱정되어 파키스탄에 일시 귀국한다. 찬게즈는 오랜만에 찾은 집안이 낙후되어 있다고 느낀 자신이 “미국인”의 시선으로 집안을 둘러보고 있음에 놀라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는 귀국 중에 기른 수염을 미국에 돌아가서도 깎지 않는다. 회사 동료들은 찬게즈의 수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며 수군거린다.
에리카가 찬게즈 앞에서도 크리스를 잊지 못하자, 찬게즈는 자신이 “크리스”라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미국인처럼 행동하며 회사 생활을 이어온 것처럼, 에리카와의 관계에서도 중심을 잃고 다른 사람인 척한 것이다. 미국 사회가 과거로 회귀한 것처럼, 에리카도 내면의 크리스와 더 많이 대화를 나누며 과거로 돌아간다. 에리카는 크리스의 죽음 이후 겪은 정신질환이 9.11 테러 이후 심해져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 후 그녀는 실종된다.
찬게즈는 칠레의 출판사를 분석하러 간 출장지에서 자신이 더 이상 분석가 업무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더 이상 미국인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을 망치는 일에 가담할 수 없다. 그는 회사를 그만둔다. “근대적인 예리체리”로 사는 걸 멈춘다. 숫자와 이익만 보지 않도록 베일을 걷고 진실을 마주하기로 한다.
찬게즈는 이 모든 이야기를 고향의 식당에서 만난 한 미국인에게 들려준다. “진짜 군인”처럼 말하는 이 미국인에겐 매 시각 전화가 온다. 무슨 전화일까? 식당 안 수염을 기른 낯선 남자는 왜 미국인을 계속 경계하는가? 미국인이 식당의 웨이터를 위협적이라 느끼는 건 기분 탓일까? 찬게즈는 왜 오늘이 “조금은 중요한 밤”이라고 말할까? 찬게즈가 말하는 곧 벌어질 “가장 살벌한 일”은 무엇일까? 숙소로 돌아가는 미국인와 찬게즈를 따라오는 듯한 저들은 무슨 신호를 보내는 걸까? 식당의 웨이터는 왜 미국인의 숙소 앞까지 따라온 걸까? 이 모든 “오싹한” 신호는 찬게즈가 또 다른 근본주의자가 됐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