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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선의 서재
  • 나, 블루칼라 여자
  • 박정연
  • 16,200원 (10%900)
  • 2024-03-05
  • : 1,792

출처 : 부산노동권익센터 <부산 노동자와 동행하다>

vol 23 2024.10

나, 블루칼라 여자나, 블루칼라 여자저자박정연출판한겨레출판사발매2024.03.05.

길을 만드는 사람들

『나. 블루칼라 여자』 / 박정연 / 한겨레출판 / 2023년3월

양솔규 노동사회교육원 운영위원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흔히 말하는 ‘달동네’로 판잣집과 ‘보로꾸’집들이 빼곡한 곳이었다. 골목에서, 공터에서(그땐 공터가 참 많았다. 앗! 나이 나오나요?), 놀이터에서, 불장난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게임도 하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고. 그럼 또 여지없이 저녁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들의 호출이 울려퍼졌다. 하교할 때 시장을 가로지르다 보면, 저녁과 도시락 반찬거리를 사느라 분주한 엄마들의 흥정과,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기한 시장 물건들 구경하느라 산만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공존했다. 생명력 넘치는 베이비붐의 시대였다.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은 늘, 누구나 비슷했다. 빨간 오뎅볶음, 빨간 진미채(오징어실채, 쥐포채 등), 콩자반, 쏘세지 등. 지금 보니 이 반찬들의 공통점은 빨리, 대량으로 만들 수 있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우리 동네 엄마들은 대개 일을 나갔다. 저임금의 시대였으나 성장의 시대였기에 일자리는 널렸다. 파출부로, 공장으로, 건설현장으로, 식당으로, 밥벌이가 될 만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출산과 육아로 잠시 밥벌이 노동을 내려놓았던 그들은 ‘골목’이 아이들을 보듬어줄 만 하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발걸음을 통해 내 새끼 입에 뭐라도 넣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절실한 발걸음이었을 테다.


동학(東學)에서도, 시인 김지하도 ‘밥은 하늘’이라고 했다. 귀하다는 얘기다. 그 ‘밥’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밥벌이 노동’에 나선다. 식물처럼 물과 공기만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밥벌이 노동’을 통해서만 ‘밥’을 얻을 수 있다. 즉 ‘밥’과 ‘존재’ 사이에 ‘노동’이 숙명적으로 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밥-노동-존재’가 화폐를 매개로 ‘밥-노동-(화폐)-존재’의 형태로 드러난다. ‘밥벌이 노동’의 대표주자가 ‘임금노동’이 되는 순간이다. ‘임금노동’을 통해 우리는 삶을 꾸려 나간다.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을 얘기하면서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고 했다. 한데 낚싯바늘을 물어 삼킨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 빼도 박도 못할 수 없다. 임금노동을 통해서 밥벌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숙명을 지적하고 있다.


‘밥 타령’을 했지만, 결국 이것은 돌고 돌아 노동의 문제로, 일의 문제로, 삶의 문제로, 존재의 문제로 돌아온다. ‘밥벌이 일자리’를 구하는 게 모두에게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하지만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이 사회의 대표적인 소수자들, 여성, 장애인, 노인 등이 그들이다. 그들에게 밥벌이 일자리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인 것이다.


여기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출판사가 내미는 부제에는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라고 써 있지만, 글쎄, ‘힘 좀 쓰는 언니들’이라는 규정에는 동의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가정에 도움이 되려고” 일을 시작했을 뿐이고 “돈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다 “가장이 되면서” 일자리에 나섰을 뿐이다. ‘누군가의 아내로서, 딸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살아온 그들’이 가족들과 자신의 ‘생존’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택한 직군은 실로 다양하다. 화물 운송 노동자, 플랜트 용접사, 먹매김 노동자, 형틀 목수, 건설현장 자재정리, 레미콘 운전, 철도차량 정비, 자동차 시트 제조, 주택 수리, 빌더 목수 등 일명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밥벌이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울타리 내부는 쉽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 가끔 뜬금없이 뜨는 산업현장 릴스나, 예전 ‘체험 삶의 현장!’(앗! 나이 나오나요?) 같은 곳에서 그나마 보아왔던 치열한 현장의 모습은 누구나 쉽게 범접할 수는 없는 억센 곳이었다. 그런 곳에 ‘누군가의 아내로서, 딸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살아온 그들’이 떴다. ‘남초 직군’! 이 안에서 그들은 자본주의 노동현장에서 살아남기와, 여성노동자로서 남초 직군의 문화와 맞서 싸우며 살아남기라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힘 좀 쓰는 언니’가 되어야 했다. 도저히 자기 몸으로 들 수 없는 형틀을 들어 올려야 했고, 50kg 알곤용접기를 피멍이 들어도 메고 다녀야 했다. 때론 남성 노동자들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이것은 부드러운 ‘배제’라고 느껴졌다.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도록” 더 오버해서 일했다. 그녀들은 기회를 스스로 잡았고, ‘1인분’을 해냈다. 크론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줄기세포 수술비 1,500만원을 벌기 위해 45일 밤낮으로 일해 번 용접노동자도 있다. 가족에게 존경받고 떳떳하게 목소리 내는 것. 그들의 자부심은 곧 그들의 주체성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 밥을 책임지는 것, 1인분을 하고 난 후 받는 동료들의 인정이 그들을 주인 되게 한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고 했다. ‘밥’을 먹었으니 ‘배설’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러나 화장실은 공평하지 않았다. 드넓은 부산신항에 여자화장실은 없었고, 신도시 아파트건설 현장에 여자화장실은 없었다. 투사(鬪士)가 아님에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처음에는 참아도 보고, 물을 안 마시기도 했다. 지속가능한 해결책은 아니다. 이 문제가 사소해 보인다면, 1.5리터 원샷 때리고 한 시간만 있어 보면, 남북통일도, 미국 대선도, 한낱 사소해질 것이다. 생리를 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산부인과에 가서 아이도 다 낳았으니 자궁을 적출하면 생리를 안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가 의사 선생님한테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만큼 현장에서 편하게 일하고 싶은 그들이다. 요구하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는다.


김승섭 교수는 장애인이자 인권변호사 김원영의 책을 인용해 ‘오줌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라 말한다.(『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일하고 살아가는 공간에 나를 위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화장실이 있더라도 그걸 이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공간이 나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하버드 대학교 로웰홀 앞에 여성들이 모여 노란색 액체를 쏟아붓는 시위를 벌인다. 그들이 든 피켓에 쓰여져 있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쌀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to pee or not to pee, that is the question).” 1973년 하버드 소변 투쟁(the Harvard Pee-in of 1973)이다.



1967년 캐서린 스위처가 성별을 공개하지 않고 등록하여 보스턴 마라톤에 공식적으로 출전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참가자들이 캐서린 스위처를 붙잡아 주로에서 밀어내고 있다. 여성은 마라톤 출전 자격이 없었다.


‘오줌’ 타령을 했지만, 결국 이것도 역시 돌고 돌아 노동의 문제로, 일의 문제로, 삶의 문제로, 존재의 문제로 돌아온다. 남초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깨달은 건 하나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먼저 해주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여성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 현장을 여성 노동자가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현장으로 바꾸기 위해 그들이 1년 12달, 평상시에 꾸준히 흘렸을 노고와 눈물이 글 곳곳에 묻어난다.

여성 노동자들의 버팀목 중 하나는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남성중심적인 문화에서도 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함께 싸워”줬다. 그리고 관리자들과 사측에 대헤 경고와 항의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지켜냈다. 그런 노동조합이 윤석열 정부 하에서 탄압에 직면했다. 여성 건설노동자들은 ‘건폭’이라는 말이 억울하다고 말한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뿐인데. 건설노조를 쓰려는 현장이 없어요.”, “안전운임제가 사라진 다음 물량의 운임이 10% 깎였어요.”(화물연대)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이들의 공통적인 꿈은, 오랫동안 아프지 않고 안전하게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것. 이 책에 나오는 노동자들은 스펀지 같다. 현장과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몸소 깨닫는다. 그리곤 반응한다. 그리고 동등한 동료로 우뚝 선다. 한 마디로 근사하다.


반대로 여초(女超) 현장을 ‘때려친’ 여성들의 이야기는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동아시아)를 보기 바란다. 모두가 모두의 레퍼런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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