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도화선의 서재
  • 일본 침몰
  • 고마쓰 사쿄
  • 11,700원 (10%650)
  • 2006-08-10
  • : 174

출처: 부산 노동권익센터 소식지 2024년8월


최악의 상상이 빚어내는 희망의 열쇠



『일본침몰』 / 고마쓰 사쿄 / 범우사 / 2006년8월(2판)

양솔규 노동사회교육원 운영위원



무더위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말복도 지나고 처서(處暑)도 지났건만 부산은 오늘 현재 연속 26일 열대야로 최악의 여름으로 꼽히는 2018년에 근접하고 있다. 그럼에도 올해 여름이 남은 생에서 가장 시원했던 여름으로 기록될 거라는 어느 기상학자의 말이 섬뜩하다.


주변에서는 모처럼 휴가철을 맞아 가족끼리 가까운 일본이라도 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8월 8일 규슈 남부 미야자키현(宮崎県) 앞바다에서 규모 7.1의 지진이 발생했고, 일본 정부는 ‘난카이南海 대지진 임시 정보(거대 지진 주의)’를 발표했다. 폭염에, 지진에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8월 15일 대지진 주의보를 해제했지만, 8월10일 홋카이도 북동쪽 해역에서 6.8의 지진이 발생한 데 이어, 8월 19일에는 이바라키현 앞바다에서도 5.1의 지진이 일어났다.


마침 Neflix, Wavve, Tving 등 국내 OTT에서 일본 지진을 소재로 한 9부작 일본드라마 <일본침몰-희망의 사람>(2021)을 방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Wavve에는 쿠사나기 츠요시, 시바사키 코우 주연의 동명의 영화 <일본침몰>(2006년)을, Neflix에서는 애니메이션 <일본침몰 2020>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제작된 <일본침몰(日本沈沒)>은 1973년 고마츠 사쿄(小松佐京: 한국어판 책에는 ‘고마쓰’ 사쿄로 표기)가 쓴 동명의 소설에 기반하고 있다. 총 566쪽에 달하는 분량 때문에 당시 출판사에서는 출판을 꺼리기도 했다. 초고의 제목은 <일본멸망(日本滅亡)>이었으나, 출판사에서 수정했다. 이 소설은 판수를 거듭하면서 총 400만 부가 넘게 판매되는 등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침몰>은 당시(1973년)에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었고, 65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곧이어 라디오 드라마와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고마츠 사쿄가 1964년에 쓴 단편소설에서 이미 등장했었던 ‘일본 국토의 소멸’이라는 아이디어는 ‘지리적 침몰’을 넘어 일본 경제-정치의 위기, 일본 사회의 해체, 인류 미래의 불확실성 등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소설에서는 한 나라, 한 국가, 한 민족만의 위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맞닥뜨린 전대미문의 위기로 규정해 타국에 구호(救護)를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원작자 고마츠 사쿄는 호시 신이치(星新一), 츠츠이 야스타카(筒井康隆)와 함께 일본 SF의 3대 거장으로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마츠 사쿄는 2011년 3월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후 인터뷰에서 “나는 언제든 기꺼이 죽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 조금 더 살아서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지켜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으나, 그해 7월 28일 폐렴으로 사망하고 만다.


1931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마츠 사쿄의 본명은 고마츠 미노루(小松実). 종전 당시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던 미노루는 교토대학 입학 후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좌파 기가 있는 교토대학생’이라는 뜻으로 필명(筆名)을 사쿄(左京)로 정했다. 1945년 종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징집되어 죽은, 자신과 동갑인 14세의 소년의 사연을 듣고,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고민하면서 SF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 일본공산당이 마오주의에 입각해 조직한 지하 준군사 전위조직인 야마무라 공작대(山村工作隊) 등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폭개발과 공산당 활동방식에 의문을 품고 탈당한다.


초판이 발간된 1973년은 관동대지진(1923)이 일어난 지 50년이 되던 해였다. 저자의 모친도 19세에 관동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소설에서도 관동대지진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먼젓번 대지진 때도 한국인들의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한 것은 지진 이튿날 오후부터였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경단(自警團)이 보름 동안에 천 명 이상의 한국인을 죽였지.”(263쪽)


“근대 최초의 간토 대지진이 있었어.…도쿄는 무서운 대화재로 10만 명이라는 사람이 죽고 수천 명의 한국 사람이 유언비어로 민중에게 살해되고 또 평소부터 천황 정부로부터 눈총을 받고 있던 사회주의자가 암살되었지.…군비확장에 의한 경기회복, 대륙침략과 만주획득에 의한 위기의 타개라는 식으로 저 불행한 전쟁을 향해 전전해 갔다네.”, “결국 제1차 간토 대지진이 이 나라의 파시즘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까?”(303쪽)



이 소설이 쓰여진 1973년 즈음에는 전공투 학생운동이 사그라드는 대신, 점차 시민운동, 정치운동, 노동운동 등이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던 시기였다. 세계적으로는 오일쇼크가 닥쳤고, 국가-자본-노동의 타협에 기반한 포디즘(fordism) 자본주의 호황기가 저물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반성, 재일조선인(자이니치) 차별 철폐 운동이 시작되고, 일본 사회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고마츠 사쿄는 군국주의 일본이 상정하던 국가-국민이 일체화된 내셔널리즘에서 벗어난 관계를 상상한다. “나라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라는 총리의 발언이 이를 나타낸다. 1973년의 영화 <일본침몰>에서는 천황과 황후가 거주하는 도쿄 황거(皇居, 고쿄)로 피난을 온 국민들을 막아선 경찰에게 “문을 열어주세요. 비상사태 위원장인 총리의 명령입니다”라며, 천황의 권위보다 국민의 대표인 총리의 권위가 상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2006년의 영화 <일본침몰>은 고마츠 사쿄의 관점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일본 잠수정 파일럿의 영웅적인 희생을 통해 일본 국토 일부를 건질 수 있었고, 세계 여러 나라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일본인은 죽음 직전에서 구출된다. (2021년 드라마 <일본침몰-희망의 사람>도 홋카이도와 큐슈는 침몰 되지 않는 것으로 그린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대만 등의 경제적 부상, 중국의 패권 강화 속에서 일본 사회는 급속하게 보수화되고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는 사관을 부정하는)역사수정주의가 득세한다. 일본 내셔널리즘을 충실하게 투영한 영화 <일본침몰>(2006년판)은 헐리우드 영웅주의와 결합하면서 원작 <일본침몰>에서 명백히 후퇴한다. 원작 <일본침몰>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란 무엇인가?’, ‘일본이란 무엇인가?’ 등을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물으면서 전쟁 전후 시대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아무튼 2차세계대전 패전과 간토대지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원작 소설, 1995년 한신-고베 대지진을 깔고 있는 2006년 영화 <일본침몰>,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배경으로 하는 2021년 드라마 <일본침몰-희망의 사람>, 침몰 후 8년 후까지 상정하는 <일본침몰 2020>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판본의 “일본침몰”은 미디어믹스(media mix)의 재미를 선사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영화, 드라마, 소설에서 지진으로 인한 핵발전소의 위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서 봤듯이 ‘일본침몰’이 현실화 된다면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산재한 수백 기의 핵발전소들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해일이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일본침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멸망’, ‘지구궤멸’로 귀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일본침몰>(1973) 첫 장면에는 일본 열도가 원래 이 지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약 50년 전의 암시가 소름 끼치도록 두려운 요즘이다.







일본침몰, 小松左京, 日本沈沒, 고마쓰사쿄, 고마츠사쿄, 일본, 대지진,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