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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 속 깊은 이성 친구 (대형판)
  • 장 자끄 상뻬 글.그림
  • 16,200원 (10%900)
  • 2009-11-20
  • : 137

페이지마다 '이성 친구'에 대한 삽화와 짧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단편 그림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각 이야기가 너무 짧으니, 밑줄로 기록하기보단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 두 편을 필사해 둔다.




1.


세상에,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사랑에 빠져 있었을까. 세상에,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서로를 믿었을까. 세상에,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멍청했을까. 사랑에 빠지면 다들 그렇게 멍청해 지는 건지. 우리는 온갖 놀이를 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당시에 내가 가장 재미있어 하던 놀이는 이런 것이다. 못생겼거나 그저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 우리 앞을 지나간다. 그러면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 봐, 당신이 나를 만나는 바람에 놓쳐 버린 사람이야.> 그러나 그 놀이에는 한 가지 방해 요인이 있었다. 용모가 지나치게 수려한 남자들이 나타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 경우에 나는 즉시 그 놀이를 중단했고, 그녀는 내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완벽하고 섬세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신중하다는 그 점 때문에 불안을 느끼곤 했다. (24)


어느 노천카페의 녹색 차양 아래, 눈을 지그시 감고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커플이 앉아 있다. 남자는 다리를 꼬았고, 한쪽 팔을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 뒤로 둘렀다. 옷차림이나 장신구도 제법 여유있어 보인다. 이들이 바라보는 반대편에는 시장통처럼 사람이 우글우글하다. 바쁜 도시의 일상 속에서도 둘만의 여유를,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커플. 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 이면에 실은 남자의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그들 관계의 종결을 암시하는 듯하다. 여유를 과시하는 듯한 남자의 앉은 자세도 어쩌면 자기보다 훨씬 나은 상대방을 놓치기 싫어 부리는 허세였는지도.




2.


 우리의 행복은 우주처럼 한이 없었다. 우리는 그 행복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큰 소리로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알리지? 우리 친구들 가운데 그 행복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알고 그것의 찬양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우리는 그 행복을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보기로 했다. 나는 우리의 행복을 주제로 몇 쪽에 달하는 글을 썼다. 그녀는 그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에, 로르는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나를 완전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크나큰 의혹을 품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36)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개미가 더듬이를 맞대 의사소통을 하듯 사람도 번잡한 말 대신 텔레파시처럼 즉시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게 순간적인 접촉만으로 모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면... 말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글은 좀 덜하지만 마찬가지. 커뮤니케이션이란 피곤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개미들처럼 화학적으로 하나가 되는 듯한 소통을 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남편과의 대화가 그나마 가장 그것에 가깝지 않나 싶은데... 그래도 말로도 글로도 심지어 그림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각자만의 영역이 있을 수밖에. 굳이 억지로 나를 전부 알리려 할 필요도, 반대로 상대를 속속들이 알 필요도 없다는 걸, 우리는 부부이지만 결국엔 남이라는 걸,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한 번 되새겼다.



3.


이 책은 어제 시댁에 들렀다가 가져온 것이다. 남편의 총각 시절 방에는 책꽂이가 부족할 만큼 책이 많다. 구경을 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책, 읽고 싶은 책들을 몇 권 골랐고, 그 중 하나가 이 책이었다. 딱히 장 자끄 상뻬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저 책이 얇아서, 출퇴근길에 후루룩 읽기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다. 그리고 오늘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다 읽어 치웠다.


책날개를 넘기고 이어 색지 두 장을 넘기자 오른쪽 귀퉁이에 이런 게 써 있다:

"2004년 8월 12일

@@로부터"


8월 12일은 남편의 생일이다.



연필로 휘릭 갈겨쓴 필체는 분명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름이 중성적인 이름이었다. 처음엔 좀 헷갈렸지만 이내 알아냈다, 이 글씨체는 남편의 글씨체라는 것을...

하긴 남자에게 생일 선물로 이름을 적어 책을 선물하는 (이성애자)남자가 흔하진 않을 터... 게다가 책 제목은 "속 깊은 이성 친구"이니 이건 빼박캔트 구여친 유물이다ㅠㅠㅠㅠ 내가 내 손으로 이런 걸 발굴해오다니 나참. 비상금 끼워둔 책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4.


남편은 회사 직원들이랑 "팀워크를 다진다"더니만 방금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취해서 모셔다 드리는 중이라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내가 이런 전화를 받게 될 줄이야. 내가 이 책을 발굴해낸 걸 알기나 알까...


굳이 말하진 않을 생각이다. 그치만 책은 잘 보이는 곳에 꺼내둬야지.


꿀물이나 타놔야겠다.  (20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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