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연히 케이블 방송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봤었다. 거기서 이진태(장동건)의 약혼녀 김영신(이은주)이 쌀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 가입에 서명했다가 반공청년단에게 총살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영신은 보도연맹 가입을 추궁하는 청년단장(김수로)에게 서명하면 쌀을 준다는데 먹고살려면 어떡하냐고 말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벌어져 죽은 형의 유골을 찾는 내용으로, 실화(를 각색한 것이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민간인 학살이라는 또 다른 한국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는 영화였다.
<본 헌터>는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적 시대에 묻힌 이들의 이야기를 발굴의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책이다. 체질 인류학자 박선주 선생의 발굴 이야기와 발굴된 뼈의 주인의 입장에서 각색한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서술된다. 아산 설화산 이야기를 주로 다루며 전개되는데, 발굴의 이야기는 곧 한국 역사를 들추는 것과 같았다. 숨어있는 이야기,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복구시키고 그들을 기리는 작업이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9월 29일 밤부터 10월 초까지가 1차 시기라면, 10월 중순부터 12워 초까지가 2차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4 후퇴 때가 마지막 3차였다. 1.4 후퇴 때는 특히 가족 단위의 처형이 많았다. 이때엔 아산 둔표면을 지나던 피난민 300여 명이 미군 폭격으로 비명횡사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전쟁의 역사를 간단히 보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을 시작으로 경상도까지 수세에 몰린 국군과 UN 군이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다시 북한을 밀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라갔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후퇴를 1.4 후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북한군, 즉 인민군이 한반도를 한번 휩쓸고 다시 UN과 국군이 휩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남한이 영토를 찾았을 때 부역 혐의, 즉 인민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총살이었다.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떠나고, 기세등등하던 좌익들과 핵심 부역자들은 북한으로 올라갔다. 보도연맹 학살이라는 파도를 운 좋게 피한 아산에 더 큰 쓰나미가 밀려왔다. 부역 혐의 딱지를 붙이 인간 사냥이 시작됐다. 두 손이 묶인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서 성재산으로, 설화산으로, 탕정지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 안에는 여성도, 젖먹이도 있었다." (121p)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을 경찰이나 자위대들이 체포하거나 구금한 후 구타하거나 처형했다. 그러나 특정한 기준과 원칙 없이 소문으로만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거짓으로 잡아들이기도 했다.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고향에 남아 일을 계속하던 사람도 처형 대상이었다. 인민군에게 밥만 줘도, 그저 집에 들어오게 해줘도 죽이던 시절에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가족을 몰살했다. 관련 기사에서도 밝혀지지만 땅속엔 여성과 아이들의 시신이 많았다.
설화산에 젊은 어머니와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⑩ ] “충남 아산시 배방읍(설화산)폐광 유해발굴장으로” - 단디뉴스
어린 홍세화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왜 그때 동네 아이들까지 싹 다 죽였을까요?"
아버지는 구원舊怨과 텃세와 이권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사적 감정, 가문끼리의 기싸움 그리고 가구 수에 비해 좁은 땅. 숨기고 있던 알력이 이데올로기에 대립과 전쟁이라는 기회를 틈타 순식간에 타올랐다고 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상대 집안 씨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그 집과 땅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222p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란의 시기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시도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서양에서는 아산과 같은 모습이 근대의 마녀사냥과 다르지 않았다. 타인의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서 없는 죄를 만들어내고 타인의 씨를 말리는 것.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이들에게 부역해 인간의 잔혹한 면을 여김 없이 드러내는 자들의 모습.
이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는 박선주 교수의 영향이 컸다. 박선주는 어릴 적 합기도를 좋아해 청와대 경호실장까지 되지만 버클리대 유학을 가게 되고 하월 교수 아래서 체질인류학을 공부한다. 뼈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의대 수업을 들으며 직접 뼈를 구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그렇게 동물을 포함한 인간의 뼈까지 다양한 뼈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된다. 2000년 한국전쟁 50년을 맞아 유해발굴 산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강제징용 민간인 희생자, 국군 전사자 발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이어나간다. 대전 골령골 단양군 곡계굴 서울 강북구 우이동 낙동강 전선지역 고양시 금정 등등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는 발굴 현장에서 뼈를 통해 수많은 피해자의 사연, 고통의 흔적과 마주했다.
현재 발굴과 관련한 법 제정이 미비한 현실이다. 피해자의 가족도 나이가 들거나 세상을 떠났다. 시민 발굴단이 활발하게 참여하기도 어려워졌고, 뼈를 발견하면 누구의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먼저 발굴을 해야 하지만, 국군 수사와 민간 수사와 협력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아직도 유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땅속에 묻혀있음을,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은 언제나 존재함을, 그들의 이야기를 드러내 그들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음을 '발굴'이라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당시 부역은 어떤 행위가 협력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법률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긴급명령을 내린다."단 한 번의 재판만으로 증거 설명도 생략한 채 부역 혐의자에게 사형 또는 중형을 내릴 수 있어서 적극 활용되었다."(360p) "긴급명령 제9호 비상시 향토방위령은 우익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마을 단위의 자위대가 인민군과 공비, "기타 이에 협력하는 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시 민간단체에게 '체포'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자위대나 치안대가 임의적으로 '즉결처형' 형식으로 대량 학살할 수 있었던 건 향토방위령을 제멋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361p)
아산의 모습을 보면 국가 권력, 국가 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학살을 옹호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거나 북한을 편이었음을 색출한 것이라 말하지만, 그렇게 보수에서 좋아하는 법과 원칙은 어디로 갔을까 물을 수밖에 없다. 만약 전시에 사람을 마구 대할뿐더러 목숨까지 결정하는 자격을 갖고 있다면, 그저 의심만으로 사람을 잡아 죽일 수 있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합리적이라 여기면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군과 경찰의 지시와 집행으로 민간이 학살이 이루어진다면 누가 이 국가를 믿겠는가. 아직도 땅속에는 수많은 억울한 이야기들이 묻혀있고, 어딘가로 흘러가 영영 찾을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전쟁은 인간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인간 사이의 불신을 만들어내고, 살육의 쾌락을 느끼게 만들어 인간 정신을 오염시킨다. 양심 없는 자들의 무대가 되게 만든다.
이 책의 출간이 한국전쟁과 폭력 연구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기를, 공공역사와 평화사의 관점에서 쓴 한국전쟁이 이야기를 대표하는 책이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겨울의 이야기를 마치며 봄을 기다리는 저자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368p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