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 안돼~~~~~!!!!”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서 초저녁인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였다. 뒷목이 약간 댕겨짐이 느껴졌다. 가씨는 오늘도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악몽을 꾸기만 하면 후두부에서부터 뒷목 언저리까지가 댕겨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슨 꿈이었지?’ 멍하니 누워 가씨는 생각해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6분 여를 골몰히 생각한 끝에 내용이 대략 생각이 났다. 예쁘지만 가냘 퍼 보이는 7살 정도의 여자애가 나왔던 것 같고 자신의 모습도 그 여자 애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나 유치원생정도로 보이는 어린 모습이었다. 꿈에서 가씨는 무서워서 가위에 눌린 것 마냥 두려움에 눌려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 애는 어딘가의 낭떠러지에서 -산등성이의 낭떠러지인지 바다의 낭떠러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아무것도 못하고 보고만 있다가 여자애가 떨어진 후에야 ‘안돼, 안돼!!!’라고 외치다가 잠이 깬다. 언제부터인가 계속 꾸게 되는 꿈이다. 어릴 때 있었던 일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듯한 꿈이었기 때문에 가씨는 그 꿈을 꿀 때마다 일어나면 뒷골이 땡겼고 기괴한 느낌이 들곤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의 모습은 어둑어둑한 하늘빛 아래에 그대로였다. 가씨의 방은 10여 평되는 원룸으로 침대와 행거 등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에 것들만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보통의 남자들의 방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좀 많을 정도로 곳곳에 여자들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가씨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냉장고에서 식빵, 쨈, 우유를 꺼내고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었다. 그리고 여자사진들 속에 둘러 쌓여 토스트를 만들었다. 라디오헤드의 “creep"이 흘러 온다. 그 꿈을 꿀 때마다 듣곤 하는 음악이다.
「난 멍청이야. 난 낙오자이지.
어떻게 이렇게 지옥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난 여기에 속해있지 않아......」
방안을 흐르는 노래를 들으며 땡기는 뒷목을 간간이 주물러주며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토스트 빵이 마지막 한 입이 남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이’라는 말투로 시작되는 것을 보니 다니고 있는 회사 동료인 나씨였다.
“어이, 가씨 일어났어? 회사 몇 시까지 올 거야?”
“아아...아침부터 누구라구...나씨야? 한 11시쯤에는 갈 것 같아.”
“알았어, 오늘 일 마무리지어야 되니까 그쯤까지는 와야 돼.”
“응, 알았어. 조금 있다 봐.”
“그럼 괜히 사람 기다리게 하지말고 제시간에 나타나라구.”
“알았어. 끊을게.”
가씨는 외국계 컴퓨터 관련 회사에 다녔다. 회사 일이 주로 기한이 정해진 프로젝트로 이루어지고 외국계 기업이라서 출퇴근이 자유로운 편인 회사였다. 오늘은 몇 달 동안 지리하게 이어지던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고 몇 가지 사항만 검토하면 일이 완료되기 때문에 그동안 회사에서 날밤을 샌 일도 많았던 가씨는 여유롭게 출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씻을 생각을 하고 거울을 보았다. 며칠 간의 야근으로 면도도 제대로 못한 얼굴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푸석푸석했다. 욕실에 가서 시간을 들여 정성껏 면도를 하고, 이빨을 닦았다. 그리고 샤워를 하는데 차가운 물이 몸에 닫자 땡기던 뒷목도 잠시 괜찮아졌고 기분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샤워 후 행거에서 입을 옷을 챙겼다.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려고 목에 걸었는데 뒷목이 댕겨왔다. 왠지 좋아졌던 기분이 약간은 상한 가씨는 넥타이는 하지 않기로 했다. 문단속을 하고 집을 나서며 사진들을 향해 말했다.
“안녕 이쁜이들~~다녀올게~”
가씨는 아파트를 나서서 지하철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파트 주위에는 아이들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서로 쫓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출근시간이 끝나지 않아서 그런지 아파트주위를 벗어나 길거리로 나서자 약간 제시간을 놓친 듯한 사람들로 붐볐다. 시계를 보니 9시였다. 가씨의 회사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30분 거리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분주해 보였지만 자신은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지하철역이 있었고 회사는 역에서 10여 분의 거리였다. 바깥공기를 쐬자 기분이 약간은 상쾌해졌다. 거기다 일도 얼마 남지 않았고 잔뜩 끼어있던 구름도 조금은 얇아져서 여유로운 기분이었다. 뒷목이 댕겼던 것도 잊고 기분이 좋아진 가씨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지하철역에 들어섰다.
지하철을 타고 네 정거장을 지났을 때 가씨는 졸고 있었다. 누군가가 옆에 앉아서 깨버렸다. 덜깬 얼굴로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앉았는지 맞은 편에 꽤 예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지난 역에서 탔나보다. 까만 정장 투피스를 입고 화장은 옅지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이 왠지 도발적인 느낌이 나는 여자였다. 가만히 여자를 보고있는데 여자의 표정이 옆에 있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싫다’라는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시선을 따라 여자 옆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검은 양복에 선그라스를 쓴 척 보기에도 좀 수상해 보이는 남자가 여자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무슨 선그라스람...촌스럽게’ 라고 생각하며 가씨는 눈을 돌리고 여자를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몇 정거장이 지나자 듣기만 하던 여자가 선그라스와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사나워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왠지 선그라스가 여자를 강제로 끌고 갈려는 분위기였다. ‘이년아 말 안 들어!’ ‘내가 당신 말을 왜들어, 그리고 왜 욕하고 지랄이야!’ 등의 험악한 대화가 오갔다. 시선을 집중한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짜증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누가 나서서 말릴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가씨는 나서야 되나 가만있어야 되나 갈등했지만 왠지 나서 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선그라스가 여자를 끌어서 일으켜 세우더니 지하철 문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가씨는 뒷목이 땡기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추었고 문이 열리자 선그라스가 여자를 끌고 나갔다. 가씨는 자신도 모르게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뒷목을 왼손으로 잡으며 문을 빠져 나왔다.
아침 출근시간이 지난 거리는 한산했다. 구름이 다시 어둑하게 끼어 있었고 뒷목이 땡겼다. 사십여 미터 앞에서 선그라스는 여자를 끌고 가고 있었다. 여자는 지하철에서 반항을 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을 보고 포기했는지 별다른 저항도 없이 그냥 선그라스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가씨는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뒷목이 땡기는 것을 느끼며 약간의 불길함만을 안고 그냥 따라가고 있었다. 가다가 자기 딴에는 '이거 미행인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설픈 동작으로 봐서 미행이라고 할 만큼 잘하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선그라스는 주의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설마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했기 때문에 가씨는 어설프게 뒤따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월하게 선그라스의 눈에 띄지 않고 미행을 할 수 있었다. 가씨는 자신이 왜 따라가고 있지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계속 뒷목이 땡기는 것이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30여 분 선그라스를 미행하자, 건물 숲이 우거져 있는 동네에서 한 10여 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로 선그라스와 여자가 회전문을 통해 들어갔다. 건물 앞면은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고 가씨는 맑은 날이었다면 햇빛이 들것이라고 생각했다. 선그라스는 여자를 데리고 대리석 로비를 지나 건물 데스크를 지나서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수위아저씨가 데스크에 있을 만했는데 잠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씨는 건물 위층에 볼 일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선그라스와 여자가 있는 엘리베이터 옆에 나란히 섰다. 선그라스와 여자가 서 있는 엘리베이터가 먼저 도착했고 선그라스와 여자가 타자 가씨도 같이 탔다. 선그라스는 6층을 눌렀다. 가씨는 7층을 누르려다 그냥 같은 층에 내리는 것이 좋겠다라는 판단이 생겨 층수를 누르지는 않았다. 여자를 곁눈질로 보자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선그라스의 얼굴에는 뭔가 큰 일을 했다는 흐뭇함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6층을 알리고 선그라스와 여자가 먼저 왼쪽으로 갔다. 가씨는 오른쪽으로 일단 향했다. 그러면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곁눈질로 보았다. 선그라스는 여자의 손을 끌고 ‘천지무역’이라고 되어있는 몇 년이 지난 듯하고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명찰이 붙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가씨는 선그라스와 여자가 문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가던 길을 돌아서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잠겨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선그라스가 여자를 끌고 가느라 마음이 급했는지 주위상황을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문은 열렸다. 문이 열린 틈새로 사무실 오른편이 살짝 보였다. 생각했던 대로 낡은 책상만 몇 개 놓여져 있었고 일하고 있다는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유령회사의 사무실 같았다. 그리고 그 오른편 구석에 선그라스가 여자의 손목을 결박하고 의자에 앉혀놓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를 앉혀놓은 선그라스는 여자와 이야기인지 추궁인지를 모를 말을 시작했다. 선그라스와 여자의 얘기를 엿들어보니 여자는 선그라스에게 납치를 당한 듯 했다. 선그라스는 어느 조직 폭력배의 행동원이었고 여자는 다른 조직폭력배 보스의 정부였다. 선그라스의 조직과 여자의 남자가 보스인 조직간의 다툼이 있었는데 오랜 싸움 끝에 선그라스 쪽의 조직이 밀리게 되자 보스의 여자를 납치하여 전세를 역전시켜 보겠다는 생각이 깔린 납치였다. 가씨는 뒷목이 땡겨왔다. 그냥 화장실로 가서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를 할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조직폭력배의 이야기가 나오자 경찰에 신고할까하는 생각은 그만두었다. 여자가 경찰서에 들어가는 것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여자를 구해야 할까? 그러나 상대가 조폭이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고 여자도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니 자신이 꼭 상관할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해야 할지 갈등이 일었다. 뒷목이 땡겨왔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뒷목을 주무르다 오늘 아침의 악몽이 생각이 났다. 불현듯 자신의 어릴 때의 일이 생각나는 가씨였다.
가씨가 7살 때의 일이었다. 가씨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소심했다.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주뼛거리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고 가씨의 소심함은 더해져 갔다. 가씨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옆집에는 같은 또래의 예쁜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어린 가씨는 그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집도 바로 옆이었고 여자애가 착했기 때문에 소심했던 가씨를 잘 감싸주며 매일 같이 놀곤 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매일 서로의 집에서나 집 근처의 여러 곳에서 같이 놀곤 했다. 그러던 하루는 가씨는 찻길 옆 인도에서 여자 애와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둘이서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찻길로 빠지자 여자 애는 공을 주우려고 찻길로 갔다. 그런데 그때 승용차가 여자 애 쪽으로 달려들 줄이야... 여자 애는 자신의 눈앞에서 공중에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7살의 가씨가 뛰어들어 구해줄 수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그러나 뛰어들지는 못했더라도 소리라도 질러줄 수 있었지만 겁많고 소심했던 가씨는 벌벌 떨다가 몇 분 후 주변사람들이 목격하고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승용차가 사람을 발견하고 속도를 줄인 덕에 여자 애는 죽지는 않았지만 하반신 마비가 되고 말았다. 휠체어의 여자아이를 한번 본 이후로 가씨는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극심한 자폐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이제 여자아이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더 잘 대해주리라고 생각했을 때 여자아이의 집은 어디론지 모를 다른 마을로 이사가버렸다고 했다. 그 이후 부정기적으로 가씨에게 악몽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악몽을 꾼 날이나 무슨 일인가로 고민이 심해지면 뒷목이 땡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여자를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가씨의 방은 사진 속의 여자들로 도배되어 갔다.
다시 옛날 일이 생각나자 뒷목이 더 아파왔다. 목을 주무르며 문 앞에서 계속 고민했다. 선그라스는 여자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순간 여자의 얼굴과 어릴 적 여자아이와의 얼굴이 겹쳐짐이 느껴졌다. 어릴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던 여자아이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여자아이는 하반신 마비가 되어 버렸으니. 뒷목이 땡긴다. 뒷목을 주무르며 가씨는 어릴 때의 기억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이 그 기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갈등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던 자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왠지 이 여자를 구한다면 어렸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못해서 다친 여자아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뒷목의 땡김이 약간이나마 진정되었다. 여러 가지 사정 생각할 것 없이 보스의 정부를 구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가씨였다.
주변에 무기가 될만한 것이 있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빌딩 복도는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빗자루 몽둥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로 가서 무기를 찾아볼까? 그러나 선그라스와 여자의 얘기하는 걸로 봐서 곧 선그라스의 조직 보스에게로 여자를 데려 가려고 출발을 할 듯 했다.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뒷목을 주물렀다. 심호흡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조금 열려있던 사무실 문을 활짝 열며 무작정 선그라스를 향해 돌진했다. 여자의 놀란 얼굴과 돌아보는 선그라스의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어깨를 숙여서 선그라스의 등에 태클을 하고 사무실의 오른편 구석으로 같이 쓰러졌다. 뒤를 당한 선그라스는 욕을 하며 허우적거렸다. 선그라스의 양팔을 붙잡고 몸으로 선그라스의 몸을 고정한 채 가씨는 여자에게 말했다.
“빨리 도망가요!! 빨리!!”
“어.....예, 예??”
“빨리 도망가라니까요!!”
“아....예!!”
여자는 2초간 멍해하다가 정신차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두 손을 결박당한 채 밖으로 도망쳤다.
“이건 뭐하는 새끼야!!”
선그라스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고있던 가씨에게 선그라스는 욕과 함께 팔꿈치로 명치를 때렸다. 두세 번은 견뎠지만 네 번이 넘어가자 선그라스의 손을 잡고 있던 가씨의 손이 풀렸다.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선그라스는 가씨의 목을 잡으며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가씨가 차가운 사무실 바닥에 넘어졌다. 그리고 온갖 상스런 욕들과 함께 선그라스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머리, 배 등을 집중적으로 맞으니 정신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죽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5분 여간 가씨를 차던 선그라스는 여자를 잡으러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사무실 밖으로 황급히 달려나갔다.
선그라스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가씨를 가격하던 발길질도 없어졌다. 발길질이 없어졌지만 가씨는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편했다. 긴장이 풀렸고 그러자 온몸에 힘도 빠졌다. 옷은 발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더러 찢어져 있었다. 더러 핏자국도 보였다. 발길질을 손으로 가린다고 가렸는데도 얼굴은 구석구석 뻘겋게 달아올라 곧 멍들 것 같았다. 그러나 뒷목의 땡김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씨는 힘을 짜내 기어가다 시피해서 겨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들어섰다. 빌딩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날씨는 개어서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유리문을 향해 터벅터벅 힘없이 걷던 가씨는 걸어가는 중간에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졌다. 넘어져서 자세를 바꿔 대(大)자로 뻗어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귀찮았지만 전화를 받았다. 동료 나씨였다.
"어이, 10시에 온다는 사람이 12시가 넘었는데 뭐하고 있는 거야?"
"음...나씨...? 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묻는 말에는 대답 안하고 무슨 헛소리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눈부신 햇빛사이로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수위를 보며 가씨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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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5일이 지났다. 가씨의 얼굴은 반창고 투성이었고 오른팔은 팔꿈치아래의 뼈가 부러져서 깁스를 한 채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나갔지? 그 날 하늘이 개인 오후, 가씨는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동료들과 상사들은 행려 꼴을 나타난 가씨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들 물어봤지만 가씨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퇴근하라고 했지만 일은 끝내야 겠다는 생각에 가씨는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 자판을 치려고 양손을 들려고 했을 때 오른쪽 팔이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신음소리를 내는 가씨 옆에서 나씨는 빨리 병원이나 가라고 잔소리를 했다. 가씨의 몫이었던 몇 가지 검토를 끝내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다음날에 깁스를 하였다. 회사에서 원래 프로젝트가 끝난 후 이틀동안의 휴가가 있었지만 가씨는 행려차림으로 나타나 버린 사건도 있고 해서 요양 차 3일 간의 휴가가 더 주어졌다. 병원 가는 것 이외에는 집에서 계속 빈둥거렸다. 휴가의 마지막 날인 오늘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가씨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고 뒷목의 땡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안에서 텔레비전은 혼자 떠들고 있었고 가씨는 멍하니 문 쪽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도망간 여자의 생각이 났다. 걱정이 되었다.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잘 도망쳤을까? 선그라스는 어떻게 됐을까? 결국 여자는 선그라스에게 잡혀버렸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서 이어졌지만, 그냥 눈을 감았고 생각을 멈추었다. 팔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이후로 악몽을 꾸는 일이 없었고 뒷목이 땡기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을 하려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타자 마자 졸던 가씨는 네 정거정째 도착하자 흔들림 때문에 잠을 깨버렸다. 깨고 눈을 부비며 고개를 들고 정면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편에 보스의 정부인 여자가 앉아있는 것이었다. 순간 얼굴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려는 걸 고개를 숙여 가까스로 수습하고 다시 얼굴을 들었다. 흰 투피스 정장 차림의 여자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씨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보니 선그라스에게 잡히지는 않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가씨가 팔에 깁스를 하고 얼굴 곳곳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어서 그런지 여자는 가씨를 못 알아보는 듯 한번 흘끗하더니 가씨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가씨는 약간 억울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여자가 무사하니 그걸로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있는 정거장에 도착해서 여자의 옆을 지나쳐 지하철을 내리며 가씨는 생각했다.
‘난 구원받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