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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
인간의 유한한 삶을 우리는 흔히 여행에 빗대곤한다. 시작과 끝, 출발과 도착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진 길 위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걷다가 사랑도 하고 걷다가 이별도 하고 걷다가 지쳐 가끔은 길 위에 그냥 드러누워 끙끙거리며 앓기도 하다가 다시 일어나 또 걷는다. 길은 한없이 직선이다가 또 어느순간엔가 구불구불했다가 가시밭길이기도 하다가 하염 없이 걷다보면 산도 만나고 바다도 만난다. 그러다 어느날인가는 우리도 길 아래에 한줌 흙으로 묻힌다. 그게 여행이고, 그게 인생이다. 여행은 이렇게 삶을 닮았다. 삶은 이렇게 여행을 닮았다. 하지만 유금호의 여행은 죽음을 닮았다.

삶과 죽음이 뭐 그리 다르겠느냐마는 그의 작품집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한권의 텍스트 안에 길이 있고 그 길 위에 또 겹쳐진 길이 있어 독자는 헤메이게 된다. 적어도 작가는 안개가 자욱한 새벽 어느 길목, 현실 세계와 초현실 세계, 유년과 장년, 속과 성이 잠시 혼재하는 문명과 야만이 다르지 않은 세계를 경험했거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안에 머물러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텍스트 안에서 헤메고 또 헤메이다가 다 포기하고 망연하게 안개라는 벽 앞에 힘없이 주저앉는 순간 훅하고 코끝에 와 닿는 이름 모를 진한향에 나 또한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안개에 휘감긴 못 생긴 자연석 위에 서툰 글씨체로 새겨진 시실리....시실리라는 이름의 마을, 꿈인듯 죽음인듯, 바다 가까운 그 마을을 작가를 통해 이번 겨울 다녀오게 되었다.

꿈과 현실이 구별 안 되는 의식의 경계에서, 때때로 살아나는 대숲을 지나던 바람소리, 파도소리와 돌탑, 금목서 향기와 샤샤의 그윽한 눈빛...을 만나기 이전의 소설 속 '나'를 이제 떠올려 보자. 내가 보기엔 소설가인 '나'는 이 작품 중간에 삽입된 반짝 떠올랐다가 침잠한 젊은 소설가와 동일한 인물로 여겨진다. 10년 동안 가난하게 소설을 써오다 어느 순간 등단하게 되어 문단의 온갖 주목을 받고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게 되지만 그는 더이상 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날에 썼던 소설 만큼의 작품을 써내지 못하고 오히려 글쓰기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다 도피 겸 재충전의 목적으로 인도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조차 영혼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돌아오고야 만다.

다시 작중 화자인 '나'의 경우를 보자. 그는 무작정 목적지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무작정 떠나 차에서 내리면 탈진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걷다가 아무차나 타고 내리기를 거듭한 끝에 온몬의 힘이 소진하여 죽음의 향기를 맡게 된 때에 비로서 꿈을 꾸듯 시실리라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다만 웃음과 눈빛으로 소통하고 있다. 그는 거기서 지내면서 말, 언어라는 허망함에 대해 생각한다. 그 동안 '나'는 언어로 쌓아 올린 말의 감옥(언어의 모래 바람은 이제 작가의 발목을, 다리를, 온몸을, 심장을 찔러대며 )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마을에 머물며 언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건데 화자에 의해 이야기 형식으로 개입된 좌절한 젊은 소설가와 30대 초반 시실리에 다녀온 화자인 '나'는 결국 동일 인물로 봐도 무방하겠다. 왜냐하면 언어로 쌓아 올린 공허한 탑에 의해 억압당한 소설가는 '나'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젊은 소설가이기도 하고 나아가 이는 작가 모두를 대표한다고도 말할 수 있기때문이다.

작중인물처럼 죽음이란 근처(시실리)에 가 보싶다는 충동을 불쑥, 아니 매순간 느낀다. 말과 글이 필요 없는 곳이라면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보다는 더 자유로운 곳이리라 짐작된다. 이 단편소설을 5,6번 정도 되풀이 해 읽는 여러 날 동안 시실리 그리고 샤샤라는 이름의 처녀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실리...샤샤....이름에서조차 정말 투명한 바람소리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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