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는 ‘어둠의 속도’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갑작스럽게 무엇인가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20세가 몇 해 지난 그제야 비로소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유치원에 다닐 때 나는 학급 친구들이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가 그들에게 맞지 않아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밤 처음으로 나는 내가 진정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폐인이다. 나는 특수한 사람이다! 170p
- ‘어느 자폐인 이야기’, 템플 그란든 저 중에서 -
자폐인에 관한 책을 하나씩 찾아보게 된 것은 ‘어둠의 속도’ 덕분이었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을 거쳐 여기까지 와서, ‘템플 그란든’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어둠의 속도'의 주인공인 ‘루’와 템플은 여러가지 면에서 닮았다. 그 둘은 자폐인이며, 자폐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둘 다 아주 똑똑하며, 자신과 남들이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사실을 '어리석은' 일반인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다.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괴로워하는 대신 자신이 특별하고 하나뿐인 존재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루는 가상의 인물이고, 템플은 실재하는
사람이며, 루는 소설적 상상력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면, 템플은 자신의 의지와 부모와 선생님,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노력으로 치료받았다(굳이 표현하자면, 사실은 일반인의 생활방식을 학습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어둠의 속도’를 읽으면서 의심스러워하며, ‘정말로 자폐인이 이럴 리가 없어. 이건 소설이잖아. 픽션이라고. 작가가 멋대로 상상한 거겠지.’하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다면 또 반드시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 감동받으신 분이 있다면 또한 ‘어둠의 속도’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소설 이상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만약 내가 이 책(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을 먼저 보았다면, 마찬가지의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자폐라는 증상이 알려진 뒤로, 자폐에 관한 전문서적은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세계 최고의 학자들이 수많은 자폐인을 치료한 경험을 토대로 쓴 책도 많다. 하지만 그 어떤 책도, 이 책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는 바이다. 생각해보시라. 아무리 많은 한국인을 만난 외국인이 쓴 책이라고 해도, 한국인 자신이 쓴 책에 미칠 것인가. 아무리 많은 애완동물을 길러 본 사람이 쓴 책라고 해도, 동물 본인이 키보드를 두드려 쓴 책에 미칠 것인가. 자폐인과 일반인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더욱 더 동물과 인간의 관계와도 같을 것이다. 얼마 전에 동물에게 마음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온갖 과학논리를 끌어대어 주장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단언컨대 자폐인에게도 똑같은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자폐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의 장애이기 때문이다. 소통이 되지 않으니 그 증상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무엇에 고통받고 무엇에 안정감을 얻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오랫동안 전문가들이 자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도 용서해 줘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일종의 통역서다. 언어로 치면 2개 국어를 하는 사람이 두 언어를 비교해 놓은 책이라고나 할까. 자폐인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전문적인 책이며, 또한 그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쓰여진 책이다. 동정도 편견도 없이, 담담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회적 상호 작용이 자폐인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일일 수 있다. 어릴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끌어 줄 본능을 타고 나지 못한 동물과 같았다. 시행 착오를 통해 배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늘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게 가장 좋은지 파악하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항상 어딘가 어색했다. 어떤 사회적 행동이든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납득이 가지 않았다. 164p
자폐인에게 현실이란 사건, 사람, 장소, 소리와 형체가 서로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거대한 덩어리 같은 것이다. 뚜렷한 경계나 질서, 의미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어떤 패턴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데 보냈다. 정해진 일과나 시간, 특정한 양식이나 형식 같은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삶에 어느 정도 질서를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92p
혹시나, 템플은 정말 특수한 경우고, 그는 정말 비상한 천재였고 자폐 증상은 아주 미약해서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다. 하지만 템플의 다른 책 '어느 자폐인 이야기'를 보면, 템플의 자폐증상 역시 심각했으며, 때로는 정신지체로 분류되기도 했고, 다른 자폐인처럼 보호시설에서 살 가능성까지 충분히 있었다. 그가 유명한 동물학자가 된 것은 좋은 부모와 좋은 선생님이 있었던 탓이다. 설사 템플과 비교할 수 없이 아주 상태가 나쁜 자폐인이라 할지라도, 아주 약간의 이해만 주어진다면 최소한 그전보다는, 훨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해는 자폐인이 아니라 일반인이 가져야 하는 것이고, 이 책은 그런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와주는 책이다. 그리고 사실 내 생각에, 가장 방치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약한 자폐를 갖고 있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을 위한 사회적인 장치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자폐인에 관한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쓰여진 책이다. 템플은 동정심을 원하지도 않고 불행을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자폐인의 특성 탓에, 자신이 오늘날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자폐가 없으면 아무도 성공할 수 없다고. 그는 일에 몰두하는 자기 자신을, 남들과 다르게 사고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손가락을 튀기면 자폐가 치료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것이 지금의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템플 그란든의 이전 책 ‘어느 자폐인 이야기’와 같이 읽으시기를 권한다. 그 책은 이 책을 먼저 읽은 다음에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이 자폐인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는 책이라면, ‘어느 자폐인 이야기’는 템플 그란든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은 책이지만, 저자의 자폐증상이 그리 호전되지 않았을 당시에 쓴 글인 관계로,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점이 더욱 감동이다. 두 책을 같이 읽는다면, 저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책에 감동하셨다면 세 번째 책인 ‘동물과의 대화’까지 이어서 봐 주셔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