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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 읽은 기분은, 앞부분이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고, 내내 굉장한 감명이 몰아쳤다. 

책은 '나'(루)가 누구인지 제시하지 않은 채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의 서술은 기괴하다. 그는 사람의 표정과 언어를 하나하나 해석하고, 외국어 번역하듯이 번역하고, '예.','아니오'따위의 답변을 수업받은 것을 떠올리며 내놓고, 주차장의 차가 무슨 색이 몇 대인지 세고 복도 타일의 패턴과 잘못 놓여진 타일의 숫자에 집착한다.

이 세계는 자폐증 치료제가 획기적으로 개발되어 자폐증이 뿌리뽑혀진 시대로, 주인공 루는 치료제가 발전하고 있던 중간 정도의 세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아예 치료를 받지 못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세대와도 다르고, 유아기에 치료받아 거의 정상인처럼 살 수 있는 세대와도 다르다. 그는 학습에 의해 일상생활을 영유하지만, 여전히 정상인의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에 혼란스러워하는, '자폐인의 시선으로' 정상인의 세계를 보는 사람이다.

이 책은, '만약 자폐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또 글로 쓸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전문적인 책들보다 진지하게, 심도있게, 또 깊은 애정을 갖고 자폐인의 정신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루의 눈에 보이는 '정상인'의  세상은, 원주민들이 문명인을 보는 시선만큼이나 혼란스럽고,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고, 한편으로 자폐인보다 더 병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

 

저자는 책 뒷편에 자폐증을 설명하는 데에 몇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가 서술했다시피, 이십세기 말 ^^까지만 해도 자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었다. '말아톤'에서 선언문처럼 등장하는 "자폐는 병이 아니라 장애예요."라는 관념은 최근에나 확립된 것이다. 이전에는 정신분열증 비슷한 것으로 생각되었다(지금도 네이버 지식인을 찾으면 이 관념이 그대로 나오기도 한다). 당연히 정신지체와도 다르다. 자폐의 3분의 1은 정상인과 같거나 그 이상의 지능을 갖고 있다. 자폐와 우리의 차이는 근원적으로 타인과의 관계형성과 소통방식의 차이다. 자폐의 정도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저자는 그런 세간의 몰이해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어떤 사람은 이들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바보로 생각한다. 그저 '정상인이 아닌' 정도로만 인식하고 단순히 배척한다.

루의 눈으로 본 정상인의 세상은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자폐인들에게는 이러저러하게 관습적인 규칙을 지키라고 하면서, 사실 자기들은 그러지도 않는다. '정상인'들은 루를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고 시간을 낭비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들도 그런다. 자기들은 합리적으로 사고한다고 누누히 말하면서, 또 그러지도 않는다. 자폐인 루는 '정상인'들의 그런점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말할 때 주의를 기울이고 들여야 하고, 대체로 그렇게 하게 훈련했다. 식료품점에서 사람들은 때로 답을 기대하지 않고, 답을 들으면 화를 낸다.(113p)
정상인들이 하는 행동의 이유는 가끔은 명백하고, 가끔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196p)
나는 정상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조리 있는 패턴에 언제나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255p)
나는 느끼지 않을 때에도 관습적인 말을 하도록 배워야 했다. 그것이 적응하고 함께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크렌쇼 씨에게 적응하라고, 함께 어울리라고 말한 적이 없을까?(182p)

이야기는 새로운 약이 개발되고, 이 신약의 효용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루의 직장 상사가 강제로 자폐인 직원들에게 이 신약을 시험시키려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인체실험대상'은 되지 않겠다는 이유로 저항하던 루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에 빠진다. '나는 낫고 싶어하는 것인가?'

만약 치료를 받으면 '나'는 지금까지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나를 버려야 할까? 무엇때문에 정상인이 되어야 할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자기 혼자서 살아갈 수 도 있다. 그런 그에게 계속 '너는 비정상이므로 우리와 같아져야 한다. 치료받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정상인들이다. 자신이 낫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낫기를 바라는 것이다.

치료를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 현재의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타인과 같아져야 하는가 고뇌하는 책의 뒷부분은, 장애인에 대한 안일한 시각을 갖고 있던 소위 '정상인'의 두뇌에 연이어 충격을 준다.

어쩌면 정상과 비정상이란 단지 다수와 소수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우리들은, '본능'을 두고 '정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모습이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불규칙하고 제멋대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정확한 규칙과 논리에 따라 살고 있는 자폐인의 눈으로 보는 그런 인간세상의 모습은 괴상한 문화를 가진 외계행성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정상이 어떤 느낌일지 알지 못해. 정상인들이라고 모두 행복해보이지는 않아. 어쩌면 정상인으로 살기란, 자폐인으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쾌할지도 몰라."(427p)

SF적인 설정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사실 '루'는 미약한 자폐를 겪고 있는 사람과 동일한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세상과 섞여 살아갈 수 있다. 방해가 되는 것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상인의 편견과 몰이해다.

노력과 행동은 다르다. '돕고 싶다'는 것은 '돕겠다'는 것과는 다르다.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만이 의미가 있다.

루는 자신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상사의 말을 들으며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 상사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안다. 그가 '돕겠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SF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심리, 특수교육, 사회복지 기타 등등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기를. 그 중 두 가지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더욱 필독. 다 관심없어도 필독(...) 혹시 발달장애나 자폐를 가족이나 주변인으로 두고 계신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 애쓰시는 분들께 더욱 추천합니다. 설령 일생 같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익숙해지는 것과 정말 이해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일생보다 이 책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에 창피해하고, 또 감사하며.

(살짝 창피하지만 ^^ 이 좋은 책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팔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리뷰 남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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