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
  • 도가니
  • 공지영
  • 10,800원 (10%600)
  • 2009-06-29
  • : 31,517
표지는 이렇게나 예쁘고 산뜻한 데 말이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정말이지...
원래 소설이나 영화를 보기 전에 컨셉 정도는 알고 시작해도 줄거리는 일부러 모른 채 읽으려고, 보려고 하지만
아마 미리 줄거리를 알았다면 이 소설, 보내달라 하지도 않고 읽지도 않았을 게다.
너무 힘든 이야기니까. 

서유진 그렇다치고,
연두, 유리, 민수 그리고 다른 아이들 그렇다치고,
서유진이 보낸 이메일에 의하면 그들은 잘 지낸다고 하니까,
얼굴에서 웃음이 배어나오기 시작했고, 저녁밥을 먹게 되니 키도 쑥쑥 자라고 있다고 했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에 계속 상처받고 일상이 고달퍼도
그들은 이미 작게나마 이긴 기억 혹은 경험이 있고 함께 있으니까, 홀더(홀로 더불어)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들은 괜찮다치고,

강인호 어쩔꺼나?
'자본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자본에 패배한 것도 모자라'
아내와 딸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고는 아지만 '야만에까지 패배당한' 그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는 어쩌나?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지니고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아내는 아마 평생 고마워할 지 모르지.
아님 자기 덕분에 다시 일상에 안착할 수 있었으니 고마워하랄지도 모르지(그런 캐릭터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농담으로라도).
딸 새미는 과정 중에 무슨 일이 있었든 자기를 유복하게 키워준 아빠에게 언젠가 고마워하겠지.
하지만 소시민적임을 넘어서 패배당한, 도망친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갈
그의 외로움과 절망 아닌 절망, 그리고 소외감은 어쩔꺼나?
홀로이지도 못하고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한 그에게 서유진이 편지로 전한 그네들의 고마움과 행복 기원이 과연 액면 그대로 가닿을까?
아마도... 그는 또 담배만 태우겠지. 

언젠가 하이닉스 이전 반대때문에 이천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나서서 삭발하고
물대포 쏘거나 말거나 상경투쟁하고 할 때마다
슬그머니 빠져주신, 그리하여 이 가정을 안전하게 지키고 우리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신 아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강인호의 선택이 틀렸다거나 고귀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퉁박을 줄 수는 없지만,
그의 딸과 아내를 안전하게 품기로 한 것도 참으로 어렵고 힘든 선택이었겠지만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아빠로 기억되겠지만
그렇게 햇살이 화창한 날조차 와이셔츠 무리에서 안개를 떠올리는 그는 어쩌냔 말이다.

 




> 도가니
 

오랜 경험을 가진 그로서는 늘 하는 생각이었지만 나쁜 놈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놈들이 수갑을 찬다. 맹수는 다리를 다친 사슴 한마리를 잡을 때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법이다.    p. 149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생각해봐. 선생들 다 있는데, 애들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었겠어. 아무리 말이야. 그리고 교직자잖아. 그냥 좀 집적거린 거겠지. 사춘기 아이들이니까 그걸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고 말이야. 에잇! 사람들이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어린것들한테......"
누군가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석 형제가 그렇고 그런 못난 남자들 중의 일부일 뿐이라고 얼른 판결을 내리고 싶어했다. 그러면 도시를 뒤흔든 사나운 소동은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면서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산들산들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시 온화해졌고 햇살은 다시 때뜻해진 것만 같아서, 다가오는 아이들의 대학입시와 김장과 물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거리며 할 수 있었다.   pp. 165-166 

서유진은 오래도록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 하고 누군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뺴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서유진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 위해 남에게 가하는 폭력은 무차별적이고 잔인했다. 원칙, 도덕, 양심의 소리 같은 것은 이 무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쓰레기통에서 분리수거되어 변칙, 이득, 그렇고 그런 세상의 이치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pp. 246-247

사람들이 나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했죠. 안개도 오래 겪다보면 앞이 보입니다. 이 세상은 늘 투명하고 맑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안개는 장벽이겠지만, 원래 세상이 안개 꼈다고 생각하면 다른 날들이 횡재인 거죠. 그러고 가만히 보면 안개 안 낀 날이 더 많잖아요?   ...
이렇게 차를 몰아도 법규 위반하는 놈들은 잘 잡아내죠. 지킬 거 다 지켜가면서 지키지 않는 놈들 잡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 어쨌든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 너무 이상한 믿음을 가진 거 아니에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유명한 이유는 그게 천지창조 이래 한번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
그렇다면 당신은 무진시민 모두와 싸워야 할 거요. 사방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서로서로를 눈감아주고 있어요. 시의원과 건설업자의 처남이, 운전면허시험장 직원과 병원장 사모님이, 룸쌀롱 마담과 경찰서장이, 밤무대 무명 가수와 외로운 사모님이, 유부녀와 목사가, 교수와 교재 출판업자가, 시교육청과 입시학원 원장이 서로를 봐준다며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해대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은 가끔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번만 눈감아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pp. 253-255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p. 257

가끔 그런 일이 있다. 해일이 바다 밑바닥을 뒤집어놓듯이. 존재 자체를 뒤집어내는 그런 일. 잊은 줄만 알았던 과거가 혼령처럼 불려나와 아무리 술을 마시고 취해 엎어져 있어도,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나온 자리마다 붉은 상처가 선연하고 돌보지 않은 상처들은 이제 악취를 풍기고 있다.  p. 258

알면서도 매번 스스로 속는 것이 인생일까. 언제나 공포는 상상할 때 더 크다는 것을 말이다.   p. 269
 
홀로는 쓸쓸하고 더불어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군중. 그래서 끝끝내 홀로이지도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할 사람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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