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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 12,150원 (10%670)
  • 2007-11-25
  • : 15,396

해피엔딩, 부르카를 입은 어미들의 방식

 

 

  누구나 해피엔딩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의 해피엔딩은 저마다 다르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엔딩은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리암과 라일라가 도망치려 했을 때, 그들이 무사히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고국을 등지고 난민이 된다고 해서 모진 삶에서 벗어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난민의 설움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 뿌리 내리지 못하고 끝끝내 부평초처럼 떠돌 삶 역시 맵고 쓰기는 마찬가지일텐데 ‘그 후로도’의 이야기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싶었다. 다만 지금껏 말없이 수긍해야 했던 폭력과 불합리한 삶에서 무사하게 벗어나기만을 바랐다. 늘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 그녀들의 삶이 문체와는 달리 너무도 신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와 뼈를 만들어 준 어미의 사랑을 따순 손길로 느끼지 못한 그녀들이 어미로서 자식들 앞에서 당당하고, 자식들에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주고자 용기를 냈을 때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가 한참을 고른 끝에 마침내 말을 건 한 사내를 선하디 선한 인상으로 그리는 동안 심장은 제멋대로 뛰었다. 마침내 버스 앞까지 당도한 그네들. 이제 버스에 타기만 하면 된다. 부르릉, 시동이 걸리고 출발하기만 하면 눈으로 읽는 것조차 맘 편하지 않았던 고단한 삶은 끝나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고단한 삶은. 책의 두께로 보아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가 한참 더 많으니 아마도 탈출에 실패하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 경계하며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들이 믿었던 사내는 뼛속까지도 아프가니스탄 남성이었던 건지, 남달리 준법정신이 투철했던 건지 그녀들의 돈만 챙긴 채 마리암 일행을 경찰에 넘긴다. 그때의 배신감이란…. 사내가 아니라 작가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뭔 이야기가 이래? 책값이 아깝다.’라고 말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의정처럼 달콤하고 매끈한 결말이길 바랐다. 본문을 읽기 전 뒷표지의 추천사를 먼저 읽었으니까, 히드로 공항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책장을 넘겼다는 이진숙 기자의 글을 이미 읽었으니까 그런 결말일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나른하리만치 편안한 엔딩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게 외롭게, 아프게, 서럽게 버티며 살아 온 마리암과 라일라에 대한 예의일 것만 같았다.

  늘 그렇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그녀들은 결국 돌아와 라시드에게 또 다시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여인도 아내도 아닌 삶을 살아갔다. 때로 하녀처럼 때로 창녀처럼, 하루에 절반쯤은 마음에 없는 일을 하며 보냈을 그녀들은 말로에 달콤한 보상은 없었다. 남편을 죽인 마리암은 살인자의 이름으로 사형을 당해야 했고, 라일라는 이제 막 하라미(사생아)에서 벗어난 딸과 낯선 사내의 품에서 하라미로 자라야 할 아들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보상이 없다고 여겼던 것은 유쾌하지 않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던 한 독자의 성급한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월하향’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졌지만 결코 향기로웠다 할 수 없는 마리암의 삶은 감옥에 들어간 후 그 진가를 발휘한다. 살인자, 더욱이 남편을 죽였으니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푸대자루같은 부르카를 뒤집어쓰는 등 온갖 부당감을 감수하는 것이 합법적인 아프가니스탄 여인으로서는 대역죄를 지은 셈이다. 게다가 아들처럼, 손자처럼 아꼈던 잘마이의 아비를 빼앗은 셈이니 이쯤이면 패륜도 정말 악질의 패륜을 저지른 것 아니던가. 살려두어도 잘마이에게 아비를 빼앗았다는 것만으로 평생 스스로를 벌하며 살 마리암이지만 국가는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제대로 법을 적용한다. 곧 사형에 처해 질 마리암은 여성 죄수들만 모인 감옥에서는 영웅이었다. 음식조차 제공되지 않는 감옥, 스스로 면회를 사절한 마리암은 굶는 것이 마땅했지만 수많은 죄수들은 앞 다투어 그녀에게 음식을 바쳤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녀를 따르고, 자진해서 그녀에게 음식을 주었다.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기꺼이 헌납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감옥 안을 천지(天地)로 알고 웃음을 뿌리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감옥 안에서 낳고 기르며 생을 이어가야 하는 한 많은 여인들에게 감히 남편의 부당한 폭력에 맞선 마리암은 영웅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후처를 딸처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아껴준 것도 부족해 후처와 그녀의 아이들을 도망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누구도 반기지 않았던 하라미로 태어나 하찮은 목숨을 부지하다 자녀에게는 평생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가 될 어머니가 되어 세상을 떠난 마리암은 어머니의 지위에 걸맞는 모습으로 죽는다.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향을 카불에 남기고 떠난 셈이다. 원한 것도 아니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합법이 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마리암이라는 이름은 기실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들에게 귀분(貴芬)이나 지덕(智德)이니 하는 이름이 삶과 아주 멀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리암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짙은 향기를 내뿜는 꽃이었다. 아버지 잘릴로부터, 라일라로부터 떠나는 순간부터. 단 한사람, 어머니 나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마리암으로부터 버림받았다며 목을 멘 나나의 절망은 마리암을 거쳐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통해 생의 보람으로 환생한다. 유일한 핏줄이자 가족인 딸에게 “등신 같은 하라미 년아.”라며 모욕을 주기 일쑤였던 나나는 사실 모진 어미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늘 이용당했고, 버려졌다며 한을 품고 살던 나나에게 삶에 한껏 희망을 품고 있는 딸 마리암은 존재 자체로 버겁고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 희망이 유일한 생의 이유인 마리암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외로움으로 나부끼는 딸의 마음을 한 번도 다독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 모욕과 회한과 미안함으로 남은 나나의 절망은 마리암을 거쳐 라일라에게 전해지며 다시금 희망으로 바뀐다. 라일라가 마리암을 보호하기 위해 라시드의 매질을 마리암 대신 몸으로 받은 후부터, 어색한 대화의 물꼬가 오후의 즐거운 티타임으로 이어지면서부터 ‘함께’ 한다는 것이 피를 타고 흐른 ‘절망’을 몰아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충분한 사랑을 받았던 라일라의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아비로부터,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타리크로부터 한껏 사랑받으며 자란 라일라의 진심이 잠재됐던 마리암의 속내를 건드린 것이다. 자신이 아비에게 버림받은 하라미라는 것을 확인하게 만들었던 어린 날의 들뜬 희망이 아니라 사랑받고, 사랑하고, 가족의 이름으로 서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진실된 희망을 부추긴 것이다.

  물론 충분히 사랑받았던 라일라의 경험을 되살린 것은 마리암이었다. 폭격이 끊이지 않는 도시 카불을 떠나 드디어 연인 타리크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이 사지가 찢기고 부모네마저 잃은 절망으로 바뀐 순간, 그 순간에도 생의 끈을 놓치지 않은 미약한 생명을 위해 거짓으로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던 서글픔, 그렇게 한 여자를 아내의 자리에서 하녀의 위치로 끌어내려야 했던 미안함으로 가득했던 라일라는 마리암의 투박한 보호에서 믿음을 보았고, 그 믿음이 희망을 잉태한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희망은 마지자와 잘마이와 함께 자라고, 성장하며 완전한 가족을 지향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일 뿐, 자신(마리암)이 혹은 자신의 아이(마지자)가 하라미라는 것은 사실상 이 어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남들의 시선은 다만 시선일 뿐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부르카로 온 몸을 감싸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녀들의 시선도 제한되기는 하지만.

  어떤 어미는 절망으로 아이를 버리지만(마리암의 어미 나나, 라일라의 어미 파리바, 라일라조차 한때) 어떤 어미는 절망 속에서 자랄 아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는다. 자신을 외면했던 어미의 절망 깊은 곳에는 사랑이 전제됐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미들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그리했던 것뿐. 그래서 그녀들은 모성마저 꺾어버렸던 모진 삶, 그조차 넘어서 다시 희망을 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꾸린 가정은 어미들의 사랑은 차고 넘치지만 아비가 없는 가족이었다. 잘마이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마지자에게도 아마 크게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마리암과 라일라는 ‘아이들에게 온화하고 자상한 아버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날 마리암이 목요일마다 기다렸던 잘릴처럼, 어린 날 라일라의 교육에 유난히 신경을 쓰던 바비처럼. 마리암의 희생을 딛고 라일라는 온전한, 완전한 가정 꾸리기를 시도한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잘마이가 타리크를 아빠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그 누구도 하라미가 아닌 완전한 가정을 갖게 된다.

  흔히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각자를 반쪽짜리에 비유한다. 반쪽뿐인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하게 해 줄 반쪽을 찾는 과정에 사랑을 빗대곤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완전한 반쪽은 나와 아귀가 딱 맞아야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움푹 패인 곳은 뾰족하게 튀어나와야 하고 내가 튀어나온 곳은 패여야 한다. 그런 반쪽들이 하나가 되려면 어지간히도 아플 것이다. 서로 다른 상대의 모습을 받아들인 채 아귀가 맞도록 끼워 맞춰야 하니 말이다. 받아들이는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알면서도 아프게 했던 마리암과 라일라 사이도, 잘마이와 타리크 사이도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며 그들은 완전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완전한 사랑 혹은 완전한 가족이라는 데 핏줄은 의미 없었다. 우리네나 그네들이나 핏줄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진데, 그 기준으로 보자면 그네들이 꾸린 가정은 콩가루 집안과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의 후처를 딸이라 부르는 마리암, 혐오하는 남편의 씨앗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까봐 낙태할 맘을 품었던 어미 라일라, 라일라가 몰래 품고 온 다른 사내의 아이인 마지자, 라일라가 한때 낳고 싶지 않아했던 아이인 잘마이, 아내들에게는 노동이든 성이든 착취만 해대는 남편 라시드. 혹은, 라일라과 타리크의 핏줄이지만 라시드의 딸로 자란 아지자, 라시드를 쏙 빼닮고 유난히 그를 따랐던 아들 잘마이, 그리고 라일라를 엄마라고 부르는 수많은 고아원 아이들. 라일라와 타리크의 온전한 핏줄은 이제 막 라일라의 뱃속에서 태동을 하는 작은 핏덩이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마리암과 라일라가, 라일라와 타리크가 이룬 가정은 어느 가정보다 완전하고 견고하며 크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아마도 마음으로 낳았을 아이들(고아)을 보살피는 ‘엄마’ 라일라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수많은 아이들, 그런 라일라의 엄마로 남은 마리암, 아이들이 머물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대는 아빠 타리크. 카불이 빛나는 도시라면 그것은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져 새롭지만 완전한 형태의 가족이 되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그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전쟁과 빗발치던 폭격으로 찬란했던 유물은 파괴되고, 폭력과 앙금으로 뒤덮인 채 폐허가 된 도시 카불에서 완전한 가족이 뿌린 희망의 씨앗은 매일매일 천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떠오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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