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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유칼립투스 숲

오늘 일기의 bgm은 영화 <추락의 해부>.

알프스 산 정상에 외롭게 있는 목조 주택의 풍경이 너무 좋다. 또한 굵은 털실로 만들어진 산드라 휠러의 니트가 좋다. 또한 목조 주택 내부 특히 주방과 주방의 넓은 창으로 펼쳐지는 설원 풍경이 너무 좋다.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혼용의 대사도 좋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더 좋다. 완벽한 bgm !!!! 유일한 부작용이라면 최근 읽고, 본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산드라 휠러가 불쑥불쑥 끼어든다는 것. 


최고의 휴식은 하루를 완벽하게 낭비하는 것이다. 그런 완벽한 휴식이 바로 어제(토요일)였다. 오늘(일요일)도 낭비하고 싶지만 이미 글렀다.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모처럼 늦잠을 잤다. 근면 성실이 지나쳐서 이제는 휴일에도 늦잠을 잘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끼던 중이었기에 어제의 기분 좋은 늦잠은 희소식 중의 희소식이었다. 오전 10시에 깨서 침대에서 뒹굴다가 첫 식사를 한 것은 정오!! 원래는 오후에 영화 보러 가려고 했는데 만사가 귀찮아서 예매해 둔 영화들은 모두 취소했다. 게으름의 원천이 늦잠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원래는 지난 노동절 연휴에 몰아보기 하려고 했던 드라마 <기리고>를 봤다. 역시 이것이 찐 휴식, 찐 행복이다. 가족이니 조카니 하면서 어울리는 것보다 암막 블라인드로 창을 가린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악귀와 피가 낭자하는 호러물을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이 찐 휴식인 것!!!! 


일찍이 패티 스미스는 이런 류의 휴식에 관한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집에 돌아가기 싫었지만 짐을 꾸리고 비행기 연결편을 타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지연되었고 난 그걸 신호로 받아들였다. 출발 게시판 앞에 서 있다 보니 더 지연된다는 안내가 떴다. 충동적으로 표를 다시 예약하고 나서 히스로 익스프레스를 타고 패딩턴 역까지 갔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코벤트가든으로 가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은 호텔에서 범죄 수사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내 방은 밝고 아늑했으며, 런던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홍차를 주문하고 일기를 펼쳤다가 곧장 덮었다. 일하러 온 게 아니잖아,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ITV3에서 방송하는 미스터리 드라마를 연속으로 밤늦게까지 보러 온 거야. 몇 년 전에도 아플 때 여기 똑같은 호텔에 와서 그런 적이 있었다. 열에 달떠 비몽사몽 속을 헤매던 그 밤들은 병적으로 우울하고 성격도 더럽고 술주정뱅이에 오페라를 사랑하는 형사들의 행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M 트레인 / 패티 스미스>


형사들의 우울하고 강박적 본성은 내 성격을 거울처럼 비춘다. 그들이 찹스테이크를 먹으면 나도 룸서비스로 똑같은 요리를 시켰다. 그들이 술을 마시면 나도 미니바를 들춰보았다. 철저히 몰입하건 감정 없이 무시하건 나도 그들과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드라마 막간에는 다음 주 화요일 ITV3 채널에서 전편 연속 방송이 예정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는 <크래커>의 예고를  했다. <크래커>는 표준적인 수사 드라마가 아니지만, 내가 아끼는 드라마 중에서도 탁월한 수작이다. 로비 콜트레인이 입이 걸고 줄담배를 피워대는 과체중의 괴짜 천재 범재 심리학자 피츠를 연기한다. 이 드라마는 캐릭터의 불행한 운명을 닮아 얼마 전 방영이 중단되었으나, 워낙 방영 자체가 흔치 않기 때문에 스물네 시간 내내 <크래커>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유혹적이다. 나는 며칠 더 머무르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보았다. 그러면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일까? 애초에 여기 온 것부터가 더 미친 짓이지, 내 양심이 말했다. 

<M 트레인 / 패티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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