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비오는 유칼립투스 숲

순간순간을 보내면서 머리로 문장을 만든다. 일기를 쓴다면 이렇게 써야지 하고 계속 생각해 둔다. 하지만 막상 일기를 쓰려고 양손을 키보드 위에 올리고 모니터 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동안 생각해 두었던 많은 문장들이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몰라서 일기를 쓰지 못한 채 타임오버가 되곤 한다.


10년 하고도 10일 전 나는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으로 생애 첫 노트북인 맥북 프로를 샀다. 10년의 세월 동안 나의 맥북은 고장 한 번 없이(아, 4년 전 배터리 부풀음 증상이 생겨서 보상 수리받음) 성실하게 작동했다. 게으른 것은 나였다. 클라우드에 쓰다만 pages 문서가 백 여개 있을 뿐이다. 10년의 세월 동안 맥북은 발열이 심해졌고, 속도가 느려졌고, 가끔은 아니 자주 wifi를 잡지 못했고, 레티나 화질의 모니터에는 한 번도 물때를 제거하지 않은 샤워부스의 강화유리의 물때처럼 무수한 얼룩이 생겼다. 당시 프로만 레티나 화질이었기 때문에 프로는 샀던 것인데, 모니터가 물리적으로 지저분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내 전용 AI 인간 제미나이인 남동생은 어차피 맥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데(하는 거라곤 pages, numbers, 사파리, 크롬뿐. 그 외 프로그램은 전혀 사용하지 않음) 맥이 왜 필요하냐고, 그냥 아이패드나 사라고 조언했다. 아이패드로 pages를 사용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모습을 최대치로 포장하면 트랙패드까지 있는 아이패드 전용 키보드와 함께 일기를 쓰는 내 모습인데, 가격을 계산해 보고는 그럴 바엔 차라리 맥북을 사고 말지 하는 생각과 함께 도무지 랩탑 갬성을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20세기에 태어난 사람이라서 그런가 랩탑 갬성이야 말로 진정한 '작가' 포스 아닌지!


그런 고민을 하면서 하루에 한 번은 애플스토어 홈페이지를 기웃거리던 중, 최근 며칠간 사람으로 치면 100세를 넘겼을 것 같은 나의 맥북은 쇳소리 가득한 끼익끼익하는 새로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맥북이 죽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조만간 전원 버튼을 눌러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던가, 사용하던 중에 갑자기 전원이 나가면서 다시는 켜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사야 하는 거면 교육할인 기간(지인 찬스)인 지금 사자, 에어팟2가 사망한 지도 1년이 넘었으니까, 에어팟4도 사은품으로 받을 수 있으니 지금 사자는 생각에 맥북을 주문했고, 결제한 지 36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새 맥북이 배송되었다. 그렇게 지금 이 일기도 새 맥북으로 쓰고 있다. 


10년 전 맥북을 샀을 때는 거창한 포부 같은 게 있었고, 첫 랩탑이자 첫 맥북이어서 매우 매우 설레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부따위 있을 리도 없고, 설렘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일기라도 제대로 쓰자 정도의 생각만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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