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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9시에 잠든 까닭에 새벽 4시 반에 눈이 떠졌다.

7시간의 수면만 취하면 더 이상 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한 내 몸.

지난 1주일간 내과 실습 돌면서 고생한 걸 보상해주려 했지만 내 마음은 아직 병원을 향해 있다.

나 없이 하루종일 고생할 선배 레지던트를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해진다.

오늘 만큼은 절대로 일 생각은 말아야지, 의식적으로 노력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마음에도 적용이 되는 이 몹쓸 관성의 법칙은 사람을 미련하게 만든다.

하염없이 기다려도 해가 뜨질 않는다. 일어난지 벌써 1시간 반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여기는 햇빛이 드물게 비치는 동네, 비타민D 부족이 만연한 알래스카보다 추운 지방이다.

어제 퇴근하면서 실수로 아내 차에 핸드폰을 놓고 내려버렸다.

늦었다고 부랴부랴 그 차를 타고 출근한 아내는 차마 내 핸드폰을 발견하고도 다시 집에 돌아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해하지만 조금은 야속하다고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밤새 문명의 이기에 대해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노트북으로는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 수 없다. 여분의 전화기 따위 있을 리 없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저번처럼 자다가 아파서 깨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까. 시나리오를 구상해 본다. 어떤 행동조치를 취할 것인가?

앞으로 며칠간 34도를 웃돌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만약 몸이 아프면 근처에 24시간 영업하는 주유소나 마트에 가서 전화기를 빌려 쓰면 된다. 하여간 그래서 어쩐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침대에 누워있으면 된다. 그럼 아내가 나를 구해주러 올 것이다.

자기 전에 문득 생각이 나서, 아니 아내의 전화번호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아서 동생과 형에게 짧은 이메일을 보냈다. 핸드폰이 없으니 당장 가족들 번호를 적어서 보내라. 나는 이만 자겠다. 너무 걱정 말아라. 일어나보면 답장이 와 있겠지, 하고 느트북 전원을 껐다. 형만 답장을 보냈다. 이메일로 채팅을 하고 싶었는지 단문의 이메일을 여러 개 보냈다. 이런.

내게 핸드폰은 어떤 의미를 갖는 물건일까. 핸드폰이 없으니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다. 알쓸신잡에 나오는 김상욱 박사는 곧 핸드폰이 신체내에 칩의 형태로 이식되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상상하니 끔찍하다. 우리의 생이 다하기 전에 세상이 너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요즘 자주 생각한다.

그렇다고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겨울에, 아직 11월 중순이긴 하지만,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추위 속을, 새벽 어둠을 헤치며 병원으로 내달릴 때, 아 새 차였으면 이렇게 춥진 않았을 텐데. 히터 빵빵하고 엉따 기능까지 있으면 너무 좋을 텐데, 그걸로도 행복할 텐데, 이렇게 쓸데없이 고생하진 않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해본거다.

그러니깐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새 차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아마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니깐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명제는 참이다. 어떤 물질이든지 어느 선을 넘어가면 그것이 더 이상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선에 닿기 전까지는 다다익선이 참인 경우가 현실에선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겨울에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 감기에 자주 걸리지 않게 된다면, 배탈이 자주 나지 않는다면, 나는 오래 살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럼 돈이 많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거자나. 그러면 돈 많이 벌어서 건강하게 살자, 내 몸을 더 편안하게 해주자,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돈이 나를 오래 살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면, 기꺼이 나도 부와 명예와 권력을 쫓으며 살리라. 그런 유효한 이유로 돈이 필요하다면 말이다.

하여간 나는 지금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일출을 기다리는 것인가, 핸드폰을 그리워하는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깐 1시간 후에, 해가 떠오를 때쯤 문을 열고 들어올 아내를 맞이하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흐뭇해하고 행복감을 느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내가 보고 싶다. 지금은 그게 진심이고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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