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와
오메가
하지만
사랑에
대해
논의한
부분에서
마지막에
던졌던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도대체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이제야
우리는
비로서
이
질문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확대시킬
수
있게
되었다. 진화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우리는
은혜의
근원에
대한
불가사의함
또한
이
질문에
덧붙일
수
있다. 사랑은
의식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은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인간의
의식
외부에서
비롯되어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는
이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걸까?
우리는
이
질문들을
밀가루나
철, 혹은
번데기의
근원을
찾으려
할
때와
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없다. 그것들이
단순히
무형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과학에
비추어
볼
때
그
질문들이
너무나도
근본적인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들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진실로 전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처음 에너지가 만들어진 곳은?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는? 아마 과학이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에 답할 수 있는 날은 결국 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린 그 때까지 추측하고, 이론화하고, 상상하고, 가설을 세우는 수 밖에 없다.
은혜의
기적과
인간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존재에
대해
먼저 가설을
세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분이
존재한다는
명제
자체를
단순하고 쉬운
것으로 생각한다. 지나치게
환상적이거나 순진하며 어린아이의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더 있는가?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주어진 자료들을 무시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우리는 질문하지 않으면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해 보이긴 하지만, 자료들을 검토해보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많은 무리들 중에서 그보다 더 나은 가설이나 혹은 가설 자체를 내세울 수 있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느 누군가가 그럴 수 있을 때까지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어린이 수준의 괴이한 개념 혹은 이론적 공허함뿐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이
단순한
사실이
쉬운
철학적
사고로
안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만약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성장하고
진화하고
싶은
욕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숨을
내쉬듯’ 주어진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우린
그
모든
게
과연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물어봐야 한다. 왜 그 분께서는 우리가 성장하길 원하시는가? 우리는 무엇을 향해 성장해야 하는가? 그 끝은 어디에 있고 진화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가? 나는 여기서 신학적인 논의들에 연루되는 걸 의도하지 않으며, 학자들이 내가 ‘만약에, 그리고, 그러나’와 관련된 올바르고 추론적인 신학에서 다루는 세부사항들을 건너뜀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유부단하게 이 질문 근처를 서성인다 해도,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이 하나의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처럼(혹은 그녀처럼, 그것처럼)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신성을 향해 자라나간다. 하나님은 진화의 목적이시다. 그 분은 진화적 힘의 근원이시고 목적지이시다. 이것이 그 분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심을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 사실이
섬뜩하다고
말했지만
이는
부드럽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굉장히
오래된
사상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그
사실로부터
달아나려고
애를
써왔다. 그처럼
인간의
마음에
엄청난
멍에를
씌운
사상은
그
유례를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에게
가장
큰
요구를 안겨주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단순함의
본질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는다면, 그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전부를,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전체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무한한
권력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서
우리를
살피시고
돌봐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의 위치, 힘, 지혜, 그리고 정체성을 획득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자연스레 우리에게 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지우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직무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수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책임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생각해야만 하는 책임을 마다한다. 신격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더 높은 인식의 차원과 사랑의 행위를 향해 스스로 채찍질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안심하고 그저 인간됨을 누릴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계속 아래에 머물고 있다면, 그리고 서로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분에게 진화해야 하는 의무와 우주의 감독에 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 우리는 안정된 노년기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가능하다면 건강하고 행복하고 고마워하는 자식들과 손자들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자신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물론 이 목적들 자체는 이루기 힘들뿐더러, 폄하시킬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오랫동안 휴식을 취할 수 없고, 또 내가 해야 할 있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더 크고 넓은 지혜와 유용성을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적어도 죽을 때까지, 자기계발과 영적 성장을 위한 쉼 없는 달음박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하나님의 책임이 우리의 책임이 되야 한다. 이것이 신격을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이 혐오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처럼
성장하기를
바라시고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양분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은
결국
우리
자신의
게으름과
대면하게
만든다.
"The Road Less Traveled" by M. Scott Peck 원서, 268-271쪽 번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