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나를 가장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던 말 중 하나가 ‘문제인 걸 알고 있지만, 여기서 그렇게 열을 내면서 말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아요’였다.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1) ‘여기’서 바뀌지 않는 이야기는 ‘여기’서 굳이 꺼낼 필요가 없는 이야기가 될까, 그리고 2) 이미 ‘안다’는 건 무엇을 안다는 것이며, 이미 ‘안다’고 전제하는 이야기는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덮어두어도 되는가. 가령, 나는 「아이 10명 중 6명은 낮에 부모가 돌봐…육아부담 15년 만에 최고」(연합뉴스 2021년 11월 29일) 기사가 ‘가임 기혼여성의 출산 (계획) 기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았고(출생율 지적), 「“누가 아이 안 낳는지 밝혀졌다”.. 70년대생 직장인 여성 20% ‘무자녀’」(매일경제신문 2022년 1월 23일) 기사를 보았다. 구태여 보도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결혼, 출산, 육아휴직에 관한 선거 후보들의 공약은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이렇듯 관심의 대상인 출생율에 관해, 언론에서 언급하고 정부에서 지원하고 공직자들이 공약을 내건다고 해도 현실 출생율의 증가는커녕 감소를 둔화시키긴 했는가? 그래도 계속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의 즉각적인 시정을 위해서인가 현실에서의 보다 나은 가능성의 모색과 기약을 위해서인가. 이 모든 물음표들과 수사의문문들을 차치하고, 더 간단한 답을 내려 보자. 이야기가 계속되는 이유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문제라서다. 들어가는 문단이 길었지만, 오늘 내가 다루는 책이야말로 아주 오랜 시간 “여성적 또 ‘비생산적’(『돌봄 선언』 14, 이하 쪽수만 표기)이며 “여성의 일”(19)로 알아왔고 그래서 덮어두고 얘기하려 들지 않았던 돌봄에 관해 인식적·실천적 지평의 급진적인 확장을 선언한다. 더 케어 컬렉티브(돌봄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2017년 영국에서 결성된 단체)의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은 제목이 알려주듯 돌봄에 대해 ‘선언’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돌봄의 결여를 확산시켰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며 운을 떼는 이 책은 개인이 개인과 맺는 관계에서부터 전 지구를 대하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팽배한 “무관심의 지배”(18)에 맞선 대안의 윤곽을 그리고자 시도한다. 저자들은 돌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개인적 능력”(18)임에도 “너무 많은 돌봄 요구”(82)가 “너무 오랫동안 ‘시장’과 ‘가족’에 의존해 해결”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돌봄 선언』을 읽다보면 돌봄이라는 도탑고 따뜻하고 포근하고 왠지 엄마가 떠오를 것 같고 동시에 필요한 행위지만 돈 벌고 먹고 사는 일보단 엄청 더 중요한 것 같진 않고 나도 하긴 할 순 있으나 막상 또 하려면 조금 성가시거나 품이 많이 들 것 같다고 여겨지는 이 단어와 행위가 얼마나 급진적이고 포괄적인 가능성의 역량으로 심화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돌봄에 대해 쉽게 떠올릴 직접적인 대인 돌봄에서 더 나아가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17)까지로 개념을 확장한다. 그리고 “난잡한 돌봄의 윤리”(80)를 주창하고 “보편적 돌봄”(41)을 구체화한다. ‘난잡한 돌봄’은 돌봄이 모든 규모의 사회 영역에서 개인이나 가족 단위를 넘고 더욱이 인간을 넘어 비인간에게까지도 차별 없이 실천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보편적 돌봄’이란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이는 사회적 이상”(41)을 뜻한다.
저자들은 난잡한 돌봄과 보편적 돌봄이 가능한 지구와 미래를 그릴 대안을 정치, 친족, 공동체, 국가, 경제로 나눠 짚어간다. 선언과 주장 곳곳에는 선례가 될 만한 주로 유럽과 미국, 간혹 남미에서의 연대와 돌봄의 실천들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돌봄 선언』에서 인상적인 건 돌봄과 시장의 관계를 불신하는 대목들이다. 요컨대 ‘돌봄의 중요성을 이미 알기 때문에 돌봄 노동의 가치를 임금 인상의 방식으로 이어가자’와 같은 생각은 이 책의 관점에서 아주 순진하고 편협한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돌봄 노동의 저평가와 착취를 더욱 악화시킨 원인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겨냥하는 이 책은 “돌봄과 자본주의 논리는 타협할 수 없다”(142)고 강력히 설파하며 돌봄 인프라의 탈시장화와 “모든 생애주기에서”(120) 돌봄을 “거의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국가를 요망한다.
누군가에게는 『돌봄 선언』의 부분부분들이 조금 과격하고 비약적으로 느껴진다고 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이 ‘선언문’이기에 가능한 범위라고 생각하며, 더군다나 “주4일제 캠페인”(125)이나 “협동조합과 인소싱부터 (…) 시장의 지역화”(156) 등과 같이 우리네 일상과도 멀지 않은 실천적 대안들도 곳곳 있고, 더더욱이나 돌봄이 이토록 광대한 사회·정치적 현안들로 증식될 수 있다는 건 기존에 우리가 쉬이 안다고 믿은 돌봄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다시 이 글을 열었던 내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안다고 믿는 건 많은 걸 덮어버린다. 게다가 그렇게 덮어버림으로써 더 많은 걸 볼 수 있고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재단한다. 돌봄을 손쉽게 안다고 치부하고 덮을 때 주4일제 노동 같은 피부에 더 와닿는 논의로 뻗어나갈 가능성을 잃는다. 또한 문제는 계속해서 떠들어야 한다. 그게 지금 여기서 당장 시정되지 않을지라도 문제라는 이유는 그자체만으로 떠들 수 있어야 한다. 팬데믹 이후 돌봄이 결여나 공백과 짝을 지어 이야기 터져 나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좌시했던 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 좌고우면했던 태도의 수면 아래에서 더 많은 문제들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돌봄 선언』은 그간 사적 영역이나 시장으로 내몰렸던 돌봄이 여성을, 이주민을, 글로벌 사우스를, 환경을 그리고 지구를 어떻게 무관심의 영역으로 덮어버렸는지를 통탄한다. 저자들은 돌봄의 어려움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전망에는 회의적이지만, 그 어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전망에는 긍정적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열을 내고 말하고 떠들 것이다. 이건 단지 내가 돌봄 노동의 주체라서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지난 해 6월에서야, 그러니까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지 68년이 지나서야 가사근로자 고용개선법(이하 가사근로자법)이 통과된 현실 안에서, 나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을 절감한다.
작년 나를 가장 깊은 생각으로 몰고 갔던 일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으니 조금은 희망차게 이 글도 마무리해볼까 한다. 2021년 읽었던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문장이다. “가사, 양육, 간병 등 돌봄노동은 힘들고 번거로운 의무인 것처럼 인식되지만, 한편으로 자기 자신과 친밀한 사람들은 돌볼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삶의 본질적인 기쁨이자 누구나 생애 주기 속에서 원하는 때에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권리이기도 하다”(이철수, 이다혜, 『영혼 있는 노동』, 스리체어스, 2019, 71). 우리는 누구나 어떻게든 돌봄을 통해 자랐고 살아가고 있다. 멋지지 않은가, 돌본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애 주기에서 경험해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는 것. 그렇다, 돌봄은 알고 있더라도 여전히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