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느낀 바 있다.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서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적어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심장,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는 것이다." (289 재인용)
부제인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오늘날의 우리들이 허무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유명 작품들과 작가들을 따라가며 비판도 하고 보완도 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인간 존재의 확장은 무엇에 관심을 가질 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얘기다”(367). “우리는 탈마법화된 우리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성스러움들을 찾아내는 기예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376). 결론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모든 순간은 빛나기 때문에 사건과 순간에 나를 내맡기고 의미를 관조하라는 정도가 되겠다. (ps. 나에게 남은 질문. 그렇다면 인식이나 사고의 전환이 해답이란 것과 차이가 있을까? 보다 큰 구조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 채로 남지 않을까?)
후반부로 갈수록 하이데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으면서 하이데거를 말하는 저자들의 내공과 탁월함이 느껴진다. 장황하게 늘여놓지 않으면서 글에 충분히 녹아들어가 있는 이론. 사상이나 이론의 쓸모와 실천에 대해 일상적인 삶으로부터의 출발과 연결이 아주 필요하다고 보지만 극도로 소박하거나 순진하게 다루는 방식들이 늘어나는 통에 꽤 오랜 기간 신물이 났던 터, 내게는 저자들의 사유나 깊이가 글을 방향과 질을 완전히 좌우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책이어서 의미가 깊었다. 저자들이 단테, 니체, 칸트 등이 보여준 허무주의를 이겨내는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듯이 나 또한 그들이 제시한 해결 방법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진 않지만 일정 정도는 공감하는 바인데, 그게 저자들의 학문적인 내공이 느껴져서인 듯.
전반부보다는 5장부터 술술 읽히는 편이다. 근대 이후의 철학이 나오니 상대적으로 심적인 거리감이 좁혀지기도 하고, 저자들도 중반 즈음에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정리도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멜빌의 <모비딕>을 다룬 6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언급한대로 철학적인 시각을 화려한 이론 기술보다는 저자 자신들의 단단한 시야를 바탕으로 해설해가는 설득력이 아주 쏙 빼닮고 싶을 정도였는데, 특히 이스마엘에 대한 분석이 좋았다. 에이합을 거대한 서양(철학) 역사의 침몰로 귀결시키는 건 너무 거창한 건 아닌가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수긍을 안 할 순 없었다.
이외에도 율법을 완성하러 온 예수에 대한 해석에 혼자 탄복을! “예수는 율법에 순응하기보다는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고 새롭게 말함으로써 율법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율법과 그것이 정한 금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유대교적 관념에서는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순수한 인간 욕망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념의 중심부로 옮겨놓음으로써,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동시에 그는 율법의 자리 역시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옮겨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유대 세계를 완전히 변형시킨다”(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