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10/20100114/20100114131000.html
[프로메테우스]
“함께 살자”를 외치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책소개] 쌍용차 가족대책위 이야기, 연두색 여름
박종주 기자
그 길고 긴 지옥과도 같은 터널을 우리는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씩씩하게 걸어왔다. 끝이 없을 것 같던 터널을 빠져 나오면 찬란한 빛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자”를 외치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다. - 발간사
지난 여름 취재를 갔을 때, 쌍용차 공장은 이미 한 달 가까이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공장 안에 파업 노동자들이 아직 살이 있다는 것은, 망원렌즈를 통해서나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 그들의 존재에 대한 다른 증거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공장 안에는, 가족조차 없이 자신의 일터, 자신의 동료들이 아니면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는, 공장 밖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을 두고도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만 두고 싶었을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경찰에 의해 막혀 버린 뒤였고, 싸우는 것 이외의 희망은 아마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경찰의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황망히 공장을 바라 보고 있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 노인은 아무나를 붙잡고 말을 건넸다. 자신의 아들이 공장에 있다고 했다. 오늘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고, 그래서 꼭 아들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말하는 노인은 말하는 사이사이 연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헬기가 형광안료를 섞은 물을 뿌리고, 저공비행으로 먼지를 날렸다. 살수차는 최루성분을 섞은 물을 쏘아댔다. 그야 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의 한 켠에, 도망치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 손으로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부른 배를 받치고 있던 그 사람은 “내 남편 힘내라”라는 문구가 적힌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얼마 전에 어느 기자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혹시 남편에게 희망퇴직 신청하자고 말해 본 적 있냐고.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쌍용자동차에 몸 담은지 십오 년이 넘었으니 저랑 산 세월보다 길고요, 하루 중에 저와 지내는 시간보다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인데 단지 부인이라는 이유로 자식들을 인질 삼아 돈 몇 푼 챙겨보겠다고 그리해야 옳으냐고 대답했어요.- 2009년 6월 18일의 글, 책 71쪽
지난했던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쌍용차 투쟁’의 가장 가까이에, 어쩌면 그 중심에 있었던 가족대책위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 나왔다. 흡사 학생들의 문집 같이 단출한 모습을 한 책에는 <연두색 여름>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책이지만, 가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소설 <그 여름의 붉은 장미>와 가족대책위원들이 쓴 40 여 편의 편지, 그리고 몇 장의 사진과 짧은 사건일지가 빼곡히 담긴 책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사실 쌍용차 투쟁에서 가족대책위의 역할이 컸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굳이 이런 책을 언급하지 않아도, 공장에 갇혔던 노동자들만큼이나 그 가족들이 뜨겁게 싸웠음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책을 내고 또 소개하는 이유는 아마, 그들의 싸움이 단지 ‘남편’이나 ‘아빠’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또 한 편으로는 세상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또 하나 의미를 덧붙이자면, 지난 날의 일들이 단순히 어느 여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만은 아니었음을 증언하기 위함일 것이다. 끝끝내 해고당한 사람들, 싸움의 끝에 ‘범죄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남아 있기에, 또 평택에서 만난 수많은 다른 싸움들이 있기에, 쌍용의 노동자들도 그리고 그 가족들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니 말이다.
우리 가족은 쌍용사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과 마음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을 얻은 것 같습니다.끝까지 함께 했던 동료들, 동지들, 아내, 그리고 친구들, 우리 모두 소중히 여기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2009년 10월의 글, 책 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