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이든 공동체의 고통을 공감하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제시하며 그것에 응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1910년에 출간된 <부의 비밀>을 읽다 보면,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횡행했던 시기에 근대적 과학방법론의 얼개를 차용해 대안적 가치관과 세계구원의 방식을 설득하려던 한 지식인의 노고를 얼핏 접하게 된다.
저자 월러스 워틀스는 저항적 노동운동과 인간소외를 낳는 자본주의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듯 보인다. 또 ‘자발적 가난’과 같은 불필요한 물질을 넘어선 영적 깨달음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는 일종의 마법사와 같이 물현을 통한 창조영성의 손을 들어준다.
그에 의하면, ‘부’란 모든 사람의 재능이 발현되고 공동체가 이로워지는 상태이며 동력으로서 새롭게 정의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부자가 되고 부를 창조하는 것은 유익하고 선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편재한 삶의 방식은 경쟁인데, 경쟁은 자원과 기회가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파생되고 고무된다. 그러나 이 세상을 배태하고 운영하는 우주의 에너지는 고갈될 수 없으며 근본원소로서 무한하다. 그것은 <신>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신은 결핍과 경쟁이 아니라 창조하려는 의지에게 부로서 응답한다.
가난한 자는 자본이 자본을 증식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난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억눌린 존재가 아니다. 자본은 소외의 기반과 수단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이 인간의 본원적인 주인은 아니다. 저자는 가난한 자를 그 내부의 가능성을 펼치는, 부자가 되고 있는 진행형의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그의 미래적 능력을 축하할 것을 권한다. 그럴 때 그가 힘을 얻고 신뢰를 통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의 내부에서 가능성의 영역이 일깨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각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근본이기 때문에 마음의 판,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존재방식을 인간의 존엄과 신성한 우주에 대한 겸손을 향해서 맞추는 것이다.
방법론상에서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부유해지기 위해서 주변에 널린 가난을 쳐다보지도 말라는 처방이다. 이 방법론에는 그다지 가슴이 울리지 않는다. 대안적 가치는 어느 상황에서나 통합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가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가난을 쳐다보는 것 자체가 가난에 대한 동일시와 내사를 자동적으로 낳지는 않는다. 관건은 어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가이다. 비폭력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인들에게 비폭력사상을 가르칠 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차라리 그들에게 군에 입대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분노하고 저항해본 사람이, 그리고 그것의 고통과 파괴성을 뼈저리게 절감한 사람이 비폭력의 힘을 납득하고 비폭력의 세계에 헌신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공감 없는 조언과 훈계를 통해서 변화하지도, 깨어나지도 않는다. 그 조언자가 밑바닥을 치고 올라온 자라 해도. 자비의 부유함은 공감과 인내를 포용한다.
하지만 때로 존재의 힘을 회복하고 내부의 소리를 따를 때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정말 그것을 안 보고, 그것과 잠시 거리를 두면서 내부로 피정retreat을 떠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타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연민할 수 없음에도 힘을 쥐어짜내서 연민하려고 애쓰고 연민하는 척 가장하는 것보다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수용하고 자신을 돌보는 편이 미래를 위해서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인이 아니라 어린이일 경우, 지배적 현실을 능가할 수 있는 권능에 대한 믿음을 교육 받지 못한다면, 자본주의적 경쟁과 비교, 부족의 관점이 프로그래밍 된 눈으로 자신의 처지와 세상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지게 될 소지가 커진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작금의 지배적 가치를 전수하고 대변하게 된다. 그래서 어린이에게 창조영성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경쟁과 결핍이 아니라 나눔과 창조의 가치, 타자로부터 기여 받고 서로 기여한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삶의 자세를 생성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점에서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다. 유치원부터 대학교, 가족, 사회, 직장, 국가, 그 어느 곳에서도 한 개인의 원은 무시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사회적 지배가치와 위계를 초월하는 근본원소와의 직접적인 소통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제는 개인과 더불어 이웃과 ‘풍요의 원Circle of Abundance’을 짜는 것도 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창조영성의 의의와 재미는 기존 체제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악동과 같은 신의 아이들이 세상을 놀이터로 만든다는 데 있다. ‘피해자’, ‘피억압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환하게 웃을 때, 성폭력생존자가 수치스러워하거나 낙담하거나 고통에 절어있지 않고 체험을 유머로 변형시키고 호탕하게 웃어젖힐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의 낯설음과 이질성에 너무도 당혹스러워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들은 울어야 하고, 우울해야 하며, 힘들어만 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 이다. 지배적 가치가 투영된 얼굴이 아니라 빛나는 얼굴을 스스로 빚는 기쁨은 결코 제압될 수 없고 엄연히 살아있다. 그 어떤 사람도 창조적일 때 웃는다. 아니 웃어서 세상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