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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git

   
 사람들의 고민을 깊이 들으며 그 소리의 파장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도착하는 곳은, 하나의 문 앞이다. 그 문제들이 연애이든, 학업이든, 취업이든, 업무이든, 가족관계이든, 내용들은 다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이 바라는 것을 반영해 주다보면, 그들의 입에서 마지막쯤에 나오는 것은 꿈의 실현, 삶의 목적, 소명, 존재, 영성, 깨달음, 구도 등이다. 사람들은 어두운 그 문 앞에서 손잡이를 더듬는다. 더 숲으로 들어가야겠지. 혹은 밤 속으로, 어둠 안으로. 

   <아티스트 웨이>. 가끔은 이런 책이 우리 아이들과 청소년들, 대학생들에게 배부되는 교과서였으면 좋겠다. 학교에 <삶의 예술>, <창조성 회복> 등의 이름을 단 수업이 마련된다. 한 학기 동안 청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홀로, 자기 자신과 만나고 신성을 입는 의례와 같은 충만한 여행을 떠나고, 내면의 소리와 음악을 받아 적는 모닝 페이지를 작성한다. 수업 시간에는 둥그렇게 모여 앉아, 시험 보고 점수와 등수를 매기기보다 신뢰와 격려, 협력 가운데 서로의 꿈을 나누고, 그 꿈을 물질로 변형하는 경이로운 비법들을 풀어놓는다.

  이런 아이디어가 공교육기관에서는 어렵더라도, 대안교육기관에서는 시도해볼 수 있지 않는가? 대학에서도 이런 강좌가 개설되면 어떨까?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에서는? 대학에 이런 동아리를 창설한다면? 존재의 근본으로 가닿으면서 쓸모 있는practical 장이 자라나는 세대와 또 자라다 만 세대들에게 필요하다. 물리적인 공간과 제도권의 편입이 통합돼 이런 수업이 정착돼 퍼진다면 바람직하겠으나, 나는 그런 미래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재료가 없기 때문에 창조적인 실험이 가능해지므로. 이 책에서도 권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창조성 회복 서클을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혼자서. 내가 나눔의 센터이므로.

 

  나는 2년 전엔가, 어떤 고민을 털어놓으러 온 연극 공부하는 친구에게 이 책을 넌지시 소개한 적이 있었다. 헤어질 때, 슬쩍. 무언가를 제안한다는 건, 어느 때는 침해로 다가가기에, 딱 한 번 내비치고 바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두 달 전, 그 친구의 후배를 한겨레센터 <비폭력대화> 강좌에서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이 책을 소개시켜 줘서 무척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는가. 연극 공부하는 그 친구가 나로부터 이 책을 소개 받아 읽고는 자기 후배에게 소개를 해준 것이었다. 또 그 후배는 이십대 후반에 무용으로 미국유학을 떠난 자기 오라버니에게 이 책을 소개해주고 말이다. 이렇게 돌고 돌아서 나에게까지 되돌아왔다. 때마침, 나는 이 책을 재독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꿈의 타래를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문득, 밤 속에서 빛이 고요해지지 않는가. 사람들이 얼마나 깊이 듣는가. 아주 살짝 꺼냈을 뿐인데, 그것을 핵처럼 가슴에 품고 가 발아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재능과 가능성을 억누르고 사는지 안다. 그들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여자면 여자라서, 남자면 남자라서.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지원과 인정, 사랑이 필요했을 텐데, 가정도, 학교도, 직장도, 사회도, 국가도, 그럴 수 있는 터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였을 때, 이 땅은 과연 살 땅이었는가. 어릴 때는 양육자가 가장 가까이서 아이들의 창조성의 발현을 가로막는다. 왜 그러할까? 양육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비난 받을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을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역사라든지, 치부라든지. 창조적인 작업의 소재는 거의 모두가 억압의 폭로, 진실임을 인류는 집단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창조성은 언제나 가장 첫 번째로 제거될 비소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내내 흐르는 메시지인 창조성을 무한정 후원하는 <신>은 어른들이 주조한 사회적 억압과 자기불신을 초월하는 성소이자 성좌이다. 신성한 보호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으며, 억압체제로서의 규율이 아니라 내부의 폐선 속에서 묻혀 있는 꿈의 질서를 자율적으로 생성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신은 <여기>이다. 신을 사는 여기에서 때로 울겠지. 보물 상자를 열었을 때 그 보석빛이 눈동자의 망막을 환을 그리며 되비칠 때.

 

  마지막으로 창조성 회복에 방해가 되는 검열에 대한 대응방법을 두고 약간 다른 의견을 보탠다. 저자는 그 겸열 대상에 X자를 표시하거나 욕을 함으로써 그것에 대항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런 방법은 초반에는 힘을 발휘한다. 내가 휘둘리는 대상이 아니라 휘두를 수도 있는 주체로서의 역량을 재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가슴 깊이, 창조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물었을 때, 가슴으로부터 들려온 답신은 <용서하라>였다. 나는 여기서, 이에 대해서는, 수긍하면서, 적막 속에 머문다. 묵언한다. 나는 입안 가장 끝에 자리한 어금니를 지그시 악물고 금을 더 캐야 한다. 나는 아직 흘릴 눈물이 더 많다. 

 

※ 내가 아는 선에선, 저자처럼 <아티스트 웨이>에 따라 한국에서 ‘창조성 회복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강사가 한 명 있다. 뮤지컬/영화 배우이자 밴드보컬인 김성진씨가 그인데, 창조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http://cafe.daum.net/allcre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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