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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 딸에 대하여
  • 김혜진
  • 12,600원 (10%700)
  • 2017-09-15
  • : 12,964
엄마는 딸에게 염려라는 다정한 이름으로 세상이 주는 것과 똑같은 상처를 입히고, 딸의 행복을 바란다는 명목으로 다른 누군가의 딸에게 한없이 무례했다. 이런저런 대물림 되는 것들 속에서도 부모는 자식이 자신들과는 다르길 바란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더 나은 삶 말고, 살고 싶은 삶을 응원해주면 좋을텐데. 자신이 견디기 힘든 것을 그 길을 가기 위해 자식이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모는 막아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구나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고 그것은 나만의 정체성이 되어 나를 지탱해 준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일들을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라는 이유로 그 가능성조차 막아두는게 과연 최선인 걸까. 우려와 불안을 다독이지 못해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로 서로를 옭아매고 뜻하지 않은 상처를 안긴다. 마주해야 할 현실이 비록 장밋빛이 아닐지언정 적어도 가족만큼은 그 선택을 지지했으면 좋겠다.

한때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오픈되어 있다 생각했다. 좋은게 좋은거지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지나고 나니 나는 그저 열등감과 결핍이 많았고 그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안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난 평범해 나는 정상이야. 아니 작은 우월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떠밀려 남들 하는대로 안전한 길로만 달려온 나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사회적 시선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다름을 드러낸 이들이, 그에 따른 불이익마저 감수하면서까지 주체적인 삶을 사는 그들이 빛나고 단단해 보인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부당하게 해고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혐오가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사태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P30
이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나 나올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몇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P61
그린이 불행하지 않다면요? 누구나 각자 살고 싶은 삶이 있는 거잖아요.
살고 싶은 삶? 너희 부모님은 네가 이렇게 사는 거 아시니?
도대체 어떤 부모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 삶이 어디 자기 한 사람 것인 줄 아니? 그런 삶은 없어.- P123
세상일이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고 그래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여자는 언제 어디서나 저렇게 말하겠지. 제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그 자식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또 그렇게 말하게 되겠지. 그런 식으로 세상일이라고 멀리 치워 버릴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지는 거겠지. 한두 사람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P126
딸애는 숨기거나 감추는 법이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가진 적도, 가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죽은 남편의 성격을 꼭 빼닮았다.- P153
정말이지 딸애가 원하는 게 정말 그런 것인지 묻고 싶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관계.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헛된 사이. 영원히 불완전한 채로 남는 삶.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뒤를 따라다닐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 감수해야 하는 수치심과 자괴감의 무게.
넌 정말 그런 걸 원하니?- P155
나는 내 딸이 이렇게 차별받는 게 속이 상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그 애가 일터에서 쫓겨나고 돈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난 속에 처박히고 늙어서까지 나처럼 이런 고된 육체노동 속에 내던져질까 봐 두려워요.- P169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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