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다. 언어와 이성으로 만들어진 문명사회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그 전에는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당장 보더라도 돌고래, 범고래, 보노보, 침팬지, 코끼리, 강아지, 까치와 인간은 무척이나 비슷하다. 애완견에게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잠시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나‘와, 주관적이고 일상의 ‘나‘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동안 이 문제에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그것 모두 나이므로 분열적인 모순들을 없애보자 다짐했었다. 매사에 계산적이면 힘들고, 사유에 편협하고 유치하면 일상이 불안하다. 어찌 보면 불확실한 중용이다.
˝낭만주의(Romanticism)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정의해본다면, 낭만주의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당시 유행하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범유럽적 문예 및 사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특성이기도 한 17세기 합리주의와 그것의 사회적 형식인 18세기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세의 신(神 )‘이 앉았던 바로 그 전능한 자리에 올려 앉혔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것에 의해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까지도 새롭게 조명하고 규제하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드러난 것이 곧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 ‘계몽된 사회’, 그리고 마치 시계)와 같이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 자연’이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인간관과 세계관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답답할 정도로 편협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비합리적 또는 비도덕적 인간과 비과학적 세계를 옹호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이성보다 감성, 사고보다는 의지, 과학 보다 신화나 예술, 차가운 도덕 보다 뜨거운 열정,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론적 세계보다는 수많은 신들과 요정들이 함께 살고 있어 그것들을 변화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유기체적 세계가 더 진실하고 가치있게 생각되었던 겁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요.˝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 pp.47-49
계몽주의가 너무 많이 나아가서 실패했다. 언어가 이성의 토대고 숙련되기 무척 힘들다. 문명은 야만으로 떨어지기 쉽다. 사회 자체도 인류 역사에서는 새로운 것이고 거기다가 전지구적 과학적 사회는 모든 생명체가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해결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굳이 정치에서의 데마고그만이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고 근거없이 무작정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는 싸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고로 데마고그를 막는 방법은 전문가의 강화거나 대중의 박식함이지만 양쪽 모두 악용될 소지가 있고 한마디로 말해서 인류에게는 그럴 역량이 부족하다.
잠시만, 그런데 그냥 모든 사람들이 똑똑해지면 어떨까? 아나키즘이 아니라, 정말 그냥 말해봐서. 카를 야스퍼스도 그의 책 <철학입문>에서 어린애부터 각기 다른 사람들이 책도 읽지 않고 그냥 철학적인 질문을 한다고 짧게 증언하지 않았나? 리처드 니스벳이 통계수업으로 논리적 오류가 눈에띄게 줄였다고 연구결과를 내기도 했고? 이분이 말했듯이 마치 아라비아 숫자처럼 우리가 그런 도구들을 주어서 모든 사람들을 똑똑하게 만들수 있을까? 비형식적 논리의 오류도 모두 해결하고 근거없는 권위와 신비주의를 타파할 경험을 주는 것은 어떨까?
상대주의를 말하는건 절대 아니지만 답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한다." <캉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