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182쪽)
요코 여사가 만년에 쓴 에세이집이다. 그녀가 사십 대에 쓴 에세이집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도 재밌게 읽었던 터라 설렁설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고 샀다. 그때도 그랬지만, 설렁설렁 읽으면서 자주 멈춰섰다. 유쾌하고 씩씩한 기풍은 그대로이고 삶의 철학은 더 익었다. 아, 단순히 '더 익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다. 고된 삶의 전선 한 가운데 있었던 사십 대의 그녀와는 달리, "예순여덟은 한가하다. 예순여덟은 찾는 이가 아무도 없다."(191쪽)고 말하는 그녀는 이제 훨씬 더 관조적이고 대담하다. 너무 잘 익어버린 홍시같은 철학을 보여 준다. 찾는 이가 없다고 해서 노년의 삶이 청춘보다 덜 고된 것은 아니다. 독거 노인으로 혼자 살며 치매에 걸린 아흔 살 넘은 어머니까지 요양소에 모시면서 유방암 판정과 수술을 받은 후에도 사유와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 사람들이 원하는 감동적인 인간극장류의 이야기를 하는데는 관심이 없던 사람. 인간의 하찮고 결함 많은 본성을 정직하게 드러내는데 탁월했던 예술가가 늙음, 죽음, 기억, 청춘, 도시와 세상, 변화, 몸, 감정,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작가 본인은 유쾌하고 씩씩한데, 읽는 나는 짠하고 서늘하다. 인생이 결국 그런 것이구나.
"사람은 나고 자란 원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물질이 몇 십년 전부터 몸에 밴 냄새처럼 주변으로 뭉개뭉개 퍼져나간다."(207-208쪽)
아아, 싫다. 연필을 실로 묶어 실끝을 한 점에 고정하고 원을 그릴 때, 마치 그 연필처럼, 아무리 힘껏 도망쳐도 결국엔 '나'라는 원점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니. 게다가 냄새처럼 뭉개뭉개 퍼져나가는 아우라라니! 으으, 싫다. 싫으면서도 공감한다. 공감이 간다는 사실이 더 싫다. 그나저나 나는 어째서 읽는 내내 나보다 두 배나 길게 산, 세대도 국적도 다른 일본인 할머니의 사색에 공감하는가. 휴대전화를 쓸 줄 모르는 그녀의 푸념조차도 공감의 재료가 된다.
"나는 원리 따윈 모른 채 버튼을 누르는 방법만 외웠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르면서 쓴다. 기분이 언짢다. 원리를 알려고 들면 살 수가 없다."(156쪽)
사실 대부분이 이렇게 산다, 꼭 휴대전화가 아니더라도, 원리 따윈 모른 채,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른 채, 인생의 메뉴얼 따위는 있지도 않고, 원리를 알려고 들면 우울증에 걸린다. 대충 사는 인생이 더 편하다고 말하는 요코 씨지만 실은 원리도 모르고 살아야하는 삶에 언짢았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삶의 자질구레하고 구린 모습에 눈길을 주었던 게 아닐까.
"살아 있는 인간을 이렇게 가까이서 일일이 보고 있자니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오랜만에 탄 전철에서 녹초가 되었다. 생판 모르는 남들을 투명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 한 전철 같은 건 탈 수가 없다."(156쪽)
맞다, 맞다.
"세상이 못마땅하다.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점점 못마땅하게 변하고 있다. 조그만 반딧불이 무수히 모여든 것 같은 불빛을 매달고 여기저기 서 있는 거대한 빌딩 속에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 그것으로 나는 살아간다, 살아가긴 하지만 곤란하다."(151쪽)
그렇지, 곤란하다.
"오빠, 이 세상에서 오빠를 기억하는 사람은 예순다섯 먹은 나 밖에 없어. 나 혼자뿐이야. 내가 죽으면 오빠를 추억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돼. 하지만 대머리에 주름투성이인, 예순일곱 먹은 오빠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일지도 몰라.
오빠, 오빠는 모르는 채 죽었지만 사는 것도 정말로 고단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적도 몇 번이나 있었는데 사는 동안은 죽을 수가 없어. 오빤 고작 감기 따위로 죽어버렸지만 요즘 세상이었다면 죽지 않았겠지. (……) 어릴 적부터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다고 믿어왔지만, 요즘은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 듯하다. 나는 점점 소신이라는 걸 가질 수가 없다."(63쪽)
11살에 죽어버린 오빠를 떠올리며, 이른 죽음보다도 늦은 죽음이 문제가 되는 사회를 살아가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면서 컴퓨터와 팩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원고청탁에도 제대로 응수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시대에 뒤쳐짐에 자조하기도 한다.
"이를 어쩌나.Y씨, 미안해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말았어요. 내다 버리세요. (……) 가마쿠라시대의 평균수명은 스물넷이었다고 한다. 부럽다."(145쪽)
그리고 살아서 견뎌온 칠십년 가까운 세월에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항암치료 때문에 빠지는 머리카락이 귀찮아 머리를 밀어버린 날 어머니를 찾아간 에피소드는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뭉클했다.
"점심 무렵이 지나서 엄마 요양원에 갔다. 민머리에 모자를 쓰고 갔다. 엄마는 쿨쿨 자고 있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피곤해서 엄마 침대로 파고들었다. 엄마는 내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에 남잔지 여잔지 모를 사람이 있네.'
'엄마 남편은 사노 리이치지?'
'아무것도 안 한 지 한참 됐어.' 아무것도라는 건 뭘까. 설마 엉큼한 그것일까?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왠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엉큼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큰 소리로 웃자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 인기 많았어?'
'그럭저럭.' 정말일까?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마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108-109쪽)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치매를 오래 앓으셨던 외할머니 생각이 났고, 그때가 아니라 지금 옆에 계신다면 나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까 싶었다. 꼭 할머니가 "넌 그걸로 충분해요."라고 말해주신 것 같았고, 그래서 여름이 발견되기를, 의미도 모르면서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설렁설렁 읽어나갔다, 나이 든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과 친구들의 가족들과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공감하면서, 재밌어하면서, 씁쓸해하면서, 초조해하면서.
그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