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의 책은 나목 외에는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박완서 작가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1970년 습작을 써본 경험 없이 <나목>으로 여성동아 여류장편소설 공모에 당선.
2011년 81세 연세로 1월 22일 오전 6시 17분 당남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천주교 서울대교구 공원 묘지에 안장됨.
워낙 글이 많아서 뭐부터 읽어야할지 몰라 박완서 작가가 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모음집이 있다고 해서 이걸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진짜 잘 한 선택이었다.
연대별로 작가가 쓴 책 후기들을 읽다 보니 작가의 그 당시 상황, 고충, 소명 등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동아에서 등단하고 몇 년은 바쁘게 들어오는 청탁을 쓰다가 5년 만에 쓴 글을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 묶어 출판하게 된다.
처녀작이 당선 됐을 때보다 더 황홀했다고 한다.
원래 박완서 작가는 <신동아>에서 한 논픽션 모집을 보고 박수근 화백 전기를 써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쓰기 시작하고 보니 사실을 증언해야 하는 논픽션보다는 거짓말을 하는 소설이 더 적성에 맞다는 걸 알게 된다.
등단을 하고 아무 데서도 원고 청탁이 없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문예지에서 원고 청탁을 받기는 <월간문학>의 이문구 씨였다. 그때 너무 기뻐서 평생 이문구 씨를 혼자서 좋아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정통적인 문학 수업을 받은 바도 없이, 또 사사한 스승도, 영향을 주고받은 문우도, 피나는 습작 시절조차 없이 어설프게 틈입자처럼 문단에 뛰어들었다는 열등감과 소외감이 항상 나에겐 있다. (41쪽)
<목마른 계절>을 쓸 때는 처음으로 세상에 글쟁이로 선을 보이게 되었을 때의 감상도 꿈을 이루었다든가, 노력한 결실을 거두었다든가 하는 보람보다는 마침내 쓰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안도나 체념에 가까운 거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소설로 쓸 작정만이 구원이었던 그 시기를 막상 소설로 쓸 때는 상상력이 조금도 움직여주지 않았다. 상상력이 먹혀들 여지가 없을 만큼 그 시절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끔찍하기도 했지만, 나 혼자만 보고 겪은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감이 소설에 대한 욕심보다는 증언 쪽에 더 중점을 두게했다.
10년이 지니도록 작가는 처녀작 빼고는 자발적으로 글을 쓸 겨를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소설이고 잡문이고 청탁에 덜미를 잡혀가며 가까스로 만들어내는 각박한 나날이었다."(51쪽)
동화집 <마지막 임금님><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은 오랜만에 자발적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순수했으므로 행복했다고 한다.
<미망>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소설이다.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은 작가가 각별히 아끼는 책이다. 여러 번 책방에서 사서 남에게 선물한 책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작가의 모습이 가장 많이 투영된 소설이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 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 없는 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게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106쪽)
<부숭이의 땅힘>은 저자가 미국에 가서 손자를 돌볼 때 들려준 이야기를 모은 동화다.
작가는 기행산문집도 썼다. 환갑이 넘어서 티베트를 민병일 시인, 이경자, 김영현과 동행해 <모독>을 집필했다. 원래 사전 조사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애먹었다고 한다. 특히 1996년에는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은 때 아닌가? 2005년에 다시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다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