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축복은 부여잡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러시아 차르 황제는 유대인들을 자국이 땅에서 쫓아냈다. 유대인들은 황제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수레에 싣고 갈 분량만큼의 짐만 허락했다. 패트리샤 폴라코의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다.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정한다. 먼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타고 갈 배의 뱃삯을 마련해야 했다. 패트리샤 폴라코의 증조할아버지는 폐렴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 뜻밖의 천사 같은 존재를 만났다. 러시아 의사였다. 자신의 집을 내주며 병든 몸을 치료해 주고 심지어 미국으로 건너갈 뱃삯도 조건 없이 마련해 준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어주었다.
증조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할머니의 찻잔'은 축복의 상징이다. 찻잔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의 축복을 빈다. 축복은 부의 많고 적음이 기준이 아니다. 가족 간의 애틋한 사랑과 보호가 곧 축복이다. 가난하더라도 가족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게 바로 축복이다. 할머니의 찻잔은 축복의 통로였다. 쫓겨가는 도망자의 신세였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며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었다.
축복의 가치는 고여 있지 않다. 흘러넘친다. 할머니의 찻잔을 러시아 의사에게 나누어준 것처럼 패트리샤 폴라코의 가족들은 이웃들에게 증조할머니의 유언처럼 빵과 소금을 나누듯 자신의 것들을 기꺼이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간다. 축복은 나누어 주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부여잡고 지키는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축복의 사람은 나누는 삶을 산다. 언뜻 나누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있겠지만 나중을 생각한다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로 축복은 반드시 물질적인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질적 풍요가 주는 정신적 빈곤도 생각해야 한다. 인색한 삶은 메마른 땅과 같다.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나눔은 부유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공감하기에 어려움을 함께 하고자 함이다. 이웃의 고통에 눈을 감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약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부유할수록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축복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