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갔던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당시로서는 젊은 나이였던 스물네 살 홍경해 청년이 다녀온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되고 안전이 보장된 국가 간 교류였지만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여러 기후 조건이 맞지 않거나 전염병으로 고국으로 돌아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을 받아 사절단으로 가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 아니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게 된다. 참고로 조선통신사의 '통신'은 '믿음을 주고받는다'라는 뜻이다.
홍경해의 조선통신사 동행기 『나는 조선의 가장 어린 여행 작가』가 기록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본 사실을 기록으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20대 청년의 시선으로 사심 없이 편견을 배제하고 조선보다 발달된 모습들을 기록함으로써 일본을 마냥 오랑캐로 취급하던 사대부들에게 경종을 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홍경해는 조선과 일본의 다른 점을 비교했다. 도시의 모습, 문화, 사람들의 옷차림,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18세기 일본의 시골 마을부터 천황이 살고 있는 도시까지 어찌 보면 국가의 기밀 사항이기도 한 모습들을 기록으로 담아왔다.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비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의 고구려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기 위해 왜곡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반박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반인들이 남긴 솔직한 기록들도 역사적 사료만큼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홍경해의 조선통신사 동행기가 마찬가지다.
섬나라인 일본은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나 보다. 조선통신사의 사절단 중에 말에서 묘기를 부리는 마상재의 모습을 보며 일본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어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글씨를 얻어내기 위해 줄을 섰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학문에 있어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 일본 사람들은 조선을 '한국'으로 불렀다는 점이다.
또한 일본은 불교가 왕성해서 가는 곳마다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불교는 신라에서 들어왔기에 불교 용어 자체도 신라말에서 유래된 것이 많았다고 한다. 불교 국가인 일본에서 승려는 백성 가운데 재주가 있고 잘생긴 사람을 가려 뽑았다고 한다. 홍경해의 기록을 통해 18세기 일본의 문화를 새롭게 알 수 있게 된다.
공식적인 관료나 학자의 기록이 아닌 평범한 20대 청년의 기록도 훗날 당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근거 자료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일상 기록도 훗날 그렇게 평가받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