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 실학자였던 박지원이 청나라 열하를 다녀와서 쓴 일기는 여행 기록문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은 청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 사행단을 보내왔다. 먼 친척뻘인 박명원이 단장이 되면서 박지원도 사절단에 포함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박지원은 긴 여정 동안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긴 장거리 출장 중에 하루하루의 일정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보통 정성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함이다. 오랑캐로 치부하고 있는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객관적 증거가 된다. 조선의 사대부 대부분은 아직도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고 있었을 때였다. 반면 박지원은 오랑캐든 아니든 배울 것이 있다면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았던 그 시절 폭우를 만나고 강을 건너며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일을 맞추어야 했었을 빡빡한 일정 속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라면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겼다. 붓과 먹, 종이로 보따리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하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사행단의 일정이 얼마나 피곤했는지 여행을 마치면 실컷 자고 싶다는 표현도 있을 정도로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해외로 여행을 떠나면 어김없이 새로운 풍경과 인상 깊은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공유한다. 박지원도 사행단이 거쳐 가는 곳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필담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가 주로 남긴 기록은 대부분 생활에 적용하면 도움이 될 만한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수레바퀴의 모양, 기와를 잇는 방법, 벽돌로 성을 쌓을 때 중간중간 바른 석회, 말을 다루는 방법, 널찍한 도로 등 조선과 다른 사회 인프라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박지원의 역사의식도 열하일기에 담겨 있다. 옛 고구려와 고조선의 국경을 판단하는 근거로 많이 회자되고 있는 평양의 위치도 두 눈으로 확인한다. 중국은 최대한 조선을 한반도 내에 가두고자 평양의 위치를 한반도 내로 고정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만 하더라도 평양의 위치 즉 수도의 위치는 유동적이었다. 역사적 고증 자료에 의하면 평양의 위치는 한반도 밖 요동 지역이었음을 밝혀낸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 기록문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고증한 연구 보고서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이 주장하는 만리장성의 길이도 당시 실제 길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고 있는 만큼 역사적 자료로도 소중한 기록물인셈이다. 외국에서도 많은 사절단이 열하를 다녀왔지만 박지원만이 유일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다. 한 개인의 기록물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여행을 다녀오면 좋고 나쁜 느낌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지만 박지원의 기록이 남다른 이유는 기록의 명확한 방향과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을 위한 기록이 아닌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한 기록이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