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우리는 문화, 사상, 도덕, 의례, 예술 등
우리 인간에게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대체로) 고유한 활동을
하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다.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든다. 윤리적 판단을 고민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협상한다. 사원이나 교회, 성스러운 숲에서
신을 숭배하기도 하고 추억을 물려주기도 한다. 가르치고 음악을 만들고 농담하고 타인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가 하면, 이성적인 설명을 하려고 애쓰기도 하며 대체로 인간다운 일을 한다. 이 영역이 바로 온갖 휴머니스트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다.” 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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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책이
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실망했느냐면,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대와
달라서 오히려 좋았다고, 읽는 내내 페이지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행복했다고 말해야겠다. 인문서와 영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식견이 좁았던
모양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휴머니즘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휴머니즘? 인간 중심주의가 세상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었는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마당에, 휴머니즘? 이런 의문(을 가장한 사실상의 힐난)이 떠올랐고, 또 이 이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단일한 이념으로 간주하기에 휴머니즘은 “다소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관성 있는, 공유된 휴머니즘 전통이
있으며 이 모든 휴머니스트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채롭지만 뜻깊은 실로
엮여 있다. 이 책에서 바로 그 여러 가닥의 실을 따라가보려고 한다.”(p.15)
그러니까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휴머니스트인 줄도 모른 채 휴머니즘을 실천해온 여러
시대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면서 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념으로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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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의 인용문은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부터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남긴 다양한 결과물을 추적하며 저자가 길어낸 휴머니스트의 특징이다. 때때로 목숨까지 바쳐가며 앎에 대한 호기심을 채웠으며, 새로운 책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먼 길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획득한 지식을 후대에 적극적으로 전하려
했던 사람들. 종교나 이념의 독단을 항상 경계하면서 진실을 위해 끊임없이 동료와 소통하던 사람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아름다운 문장과 농담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사람다운
삶을 위한 윤리를 함께 토론했던 이들. 이 책에서 만난 그들이 곧 휴머니스트였고, 그들의 실천이 휴머니즘이었다.
또 하나, “오직 연결.”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1879~1970)가
자신의 소설 『하워즈 엔드』에서 반복하는 문구. 세라 베이크웰은 휴머니즘 전통을 세우기 위해 이 말을
길잡이로 삼는다. 실제로 2026년의 나는 이 책을 통해
700년 전의 선배들과 같은 전통을 공유하면서 더 많은 지식, 더
나은 글을 열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과 나는 숙고, 기록, 읽기처럼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해 ‘연결된’ 것이다. 휴머니즘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인 셈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누가 뭐래도 어쩔 수 없는 그들의 후배였다는 사실을 마음 깊숙이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즉, 나 또한 위대한 휴머니스트의 후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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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한 휴머니즘(적 전통)이 인간다움의 전부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인간의 인지 능력은 문학, 윤리, 연결 등을 이뤄냈지만, 차원이
다른 악행과 비극 또한 인간 인지 능력에서 비롯되었으니까. 오래전 제국주의자들은 지적 능력의 차이에서
이민족, 생물종, 지구 환경 정복의 정당성을 찾았고, 일부는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다른 생물종은 꿈도
꾸지 못할 규모의 학살이 지금도 일어나는 중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인간다움 또한 양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한데 모은 휴머니즘(적 전통)이 인간다움의 한 측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에게는 인간다움의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동족과 다른 동물종, 나아가 지구를
파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이기에 그것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설령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믿기로 했다. 휴머니즘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오늘날의
휴머니스트들이 고쳐가면 될 일이다. 함께 고민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나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과 함께 휴머니스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