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예능과 함께 보냈던 때가 있었다. 아니,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든 예능을 꿰고 텔레비전 앞을 사수하던 때가 있었다. 마치 전생처럼 가물가물해진 날들이다.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텔레비전 리모컨부터 찾으려고 할까? 생각해봤는데 아닐 것 같다. ‘저 사람, 저렇게 말해 놓고 나중에 그런 사고를 쳤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니. 하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네.’하는 시큼씁쓸텁텁한 감상만 잔뜩 늘어놓게 될 테니까.
일찍 잠들기도, 밖에 나가 무언가를 하기도 애매모호한 시간을 웃음으로 보낼 수 있는 예능을 기대해보지만 아직은 요원하다.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나한테 해롭지?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면 인내하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행동하고, 반성해야 하지? 어른이 되면 내가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선택한 것들이 다 옳은 것이 되는 거 아닌가?- P25
이제 크게 바라는 건 없다. 진짜 성취감을 느껴보고 싶다. 거창한 말들에 속지 않고 매일 무언가가 쌓이고 걸러지는 ‘그저 그런 하루’가 필요하다/- P27
가슴속 이야기들이 쌓이고 견딜 수 없어 곪은 상처가 터졌을 때는 여자가 죽고, 당하고, 슬퍼하다 원혼이 되는 것을 익숙하게 여기는 이 세상 곳곳에서 절규가 시작된 때였다.- P42
고민에 경중은 없지만, 그 고민을 풀어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P44
나는 결혼 여부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고, 그것이 사회의 흐름을 바꾸는 시대의 결혼 예능이 궁금하다.- P55
학습에 재능이 있거나 부족한 재능을 뒷받침해 줄 환경이 되는 극소수 아이들이 그 가치를 향해 조금씩 성취해가고 있을 때, 학교는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에게 순응이나 포기 외에는 어떤 가치도 가르칠 예정이 없었다.- P61
노후라는 건 전전긍긍하며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가는 것이란 걸 많은 여자들의 삶을 통해서 배운다.- P69
예능 속 남성 출연자들을 보면서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감정적인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내뱉는 데 확신이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P74
2010년 대종상은 정말 사랑이 많은 영화제였다. 아무리 한 해에 좋은 영화가 많았다지만 정말 누구에게도 소외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열 개의 작품을 최우수작품상 후보로 선정해버린 영화제! 그러면 열 개에도 들지 못한 작품들의 슬픔은 누가 책임지지 싶지만 그거는 내 알 바 아닌! 그런 막무가내 선택적 박애정신!- P80
‘우리가 이 웃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는 자기연민도 쉽게 내비친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들에게 무안함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낀다. 이 모든 상황이 지겨워서 사람들은 한국 코미디를 외면한다.- P92
연극 형태의 한국 오픈 코미디가 과거의 명성을 찾으려면 경쟁 상대가 된 대안 매체의 저속함에 억울함을 갖기보단 그것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진짜 오락이 무엇인지 훌륭한 기준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P94
역사를 말하고, 소외된 것을 듣고, 불의에 참지 않으며,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든 기회가 오로지 남성에게만 주어진 방송을 보면서 공감하고, 감동하고, 응원하는 일도 앞으로는 할 수 없다.- P100
그러나 나는 정말 리얼리티 예능에서만큼은 그 사람이 존중받고 있다는 연출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117
중년 남성들의 친목 도모와 취미 계발, 잊고 살아온 꿈과 열정을 되찾는 경험 따위를 늘어져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10대 여성 시청자인 나에게 무슨 재미가 있었겠나.- P137
불법 촬영물 유포와 소비 행태가 기상예보처럼 매일 매 시각 고발되고, 권력형 성범죄와 그에 대한 수사의 미진함이 지탄을 받는다. 지금까지는 중년 남성들의 섹스 토크 같은 것들이 ‘위트’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서워서 뭔 말을 못하겠다’하면서도 결국 말을 해온 사람들은 정말 이제 닥쳐야 할 때가 왔다.- P167
나는 주변이 아닌 자기 앞길만을 챙기는 남성 예능인이 위대한 인물로 추앙되는 것을 저지할 것이다. 혐오스럽고 둔감함 발언에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오직 남성 동료만을 챙기는 인물에게 더는 ‘하느님’이나 ‘국민 MC’ 따위의 찬사를 허용하진 않을 것이다.-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