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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과 여성
책디스사운드  2025/09/28 14:57
  • 아무튼, 연필
  • 김지승
  • 10,800원 (10%600)
  • 2020-10-12
  • : 1,752

책 서두에 연필의 종류를 설명한 페이지가 있다.

9H~6H : 살인용(존 윅 시리즈 참고)

이 부분을 보자마자 책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나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았는데, 연필의 발명부터 여성의 존재와 이토록 깊은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언제든 지워질 기록을 쓰는 연필과 역사에서 종종 지워지고 마는 여성의 운명을 언급한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잘 알고 있는 연필이 나오면 반가웠고, 생소한 연필 브랜드나 제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이런 세계도 있었나 싶어서 찬찬히 보았다.

이런 여성들, 청첩장이나 묘비에도 이름을 쓸 수 없는 존재들, 공식적인 기록과 역사에서 지금도 매일 지워지는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서둘러 연필을 쥐었다.- P12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나는 다이아몬드와 흑연의 구성 성분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됐을 때처럼 ‘계속 강해 보였던 나’와 ‘그렇게 강하지 않은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어, 하고 놀랐다. 놀랐다는 점에 다시 놀라는 그런 놀람이었다.- P46
"코이누르를 소유한 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남성은 이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 혹은 저주가 함께했다. 무굴제국을 비롯해 이 코이누르를 소유했던 남성 군주의 두 제국이 멸망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하면서도 그 경고는 신선하고 멋졌다.- P48
어떤 마음은 너무 오래 산다. 너무 그렇다.- P71
무엇 되기보다 무엇 되지 않기를 바라는 꿈도 있을 것이다. 보존하지 않고 소멸시킴으로써 아끼는 마음이 있듯이. 나는 유서인 줄도 모르고 써온 유서를 버리고 백지에 썼다. 쉼.- P115
사물을 의인화할 경우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투영되는 권력관계가 있다. 약자에게는 그 관계가 현실 자체이기 때문에 조금도 재밌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것에 웃을 수 있지만 모든 사람과 같이 웃을 수는 없다.- P133
"다른 사람이 제 연필을 쓰고 있었거든요."
그의 후예들은 이를 응용할 줄 알았다.
"누군가 제 노트북을 쓰는 바람에…."
설득력은 약하지만 파커의 은유적 진심이자 농담인 핑꼐의 핵심은 누가 봐도 핑계임을 알아채게 하는 것이다.- P157
도로시가 죽기 전 묘비에 새겨달라고 부탁한 문장은 사후 방어기제의 최고레벨 같고 좋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내게 너무 가까이 와 있다.
(중략)
자기가 어쩌다 지나는 시절과 시대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요원한 일이다. 젠더와 계급과 인종, 장애 유무와 연령 등으로 조건 지어진,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국경 마을에 사는 듯한 나는 가만히 있어도 선 그어진다. 핑계와 연필, 유언과 시, 묘비명을 남긴 불행한 포유류처럼. 하지만 여자와 코끼리는 잊지 않지.- P163
앞으로도 갖고 싶은 건 갖고 싶다고 써서 남겨줘요. 그래야 다음 여성들이 그걸 욕망해도 된다는 걸 알게 돼요. 이건 나와 친구들에게도 하는 말. 그래서 쓴다. 가난한 우리는 유연한 자존감과 세심한 감각, 실패해도 안전한 경험을 갖고 싶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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