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만으로 대단하고 담백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재미까지 있으니 희귀한 책이다. 만족도 도합 104%, 사서 고생 결혼 해방 일지라는 문구부터 재미를 예감했는데 역시나. 덕분에 지루하기만 했던 출·퇴근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흥미진진하게 보냈다.
바로 짐 싸서 나와. 요즘 세상에 시집살이하면서 사는 여자 없고,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딸이 그렇게 살 필요 없어. 너 한 몸 스스로 먹여 살리지 못하게 키우지도 않았고, 부족해도 능력 쌓을 때까지 아빠가 지원해줄 테니 그냥 나와. 그럼 얘기 끝!- P20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 10대 때부터 품어온 나의 상상 속 아이는 이제 족히 스무 살은 되었을 것이다. 클 만큼 큰 그 아이를 내 삶에서 떠나보내고 나니 삶의 무게가 절반만큼은 가벼워진 것 같다.- P60
우리 집 장녀는 태어날 때부터 위아래를 헷갈려 거꾸로 태어났다고 한다. 위치를 돌려보려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방향을 고집함으로써 위아래 없는 노빠꾸의 삶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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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지만 차마 입을 열 용기는 없어 꿀꺽 말을 삼킨다. 하지만 우리 집 노빠꾸 장녀는 이럴 때 입을 다물면 죽는 병을 앓고 있기에 눈치 따위 보지 않고 크게 입을 열어 이 분위기를 박살낸다.- P67
그 집에서 벗어난 이상 그들이 무엇을 의도했든 더 이상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번에도 무사히 마감을 해냈다는 사실이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무수히 많은 ‘할 수 있다’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P92
20대에 들어간 첫 직장은 열심히 다니다가 한 번 월급이 밀리고, 두 번 월급이 밀리자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두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회사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그만둔다며 손가락질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힝. 손가락질할 거면 월급이나 주고 하세요!’- P98
정말 돈은 삭막하고 차가운 것이고, 사랑은 따뜻하고 계산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하니까 네가 그냥 해줘’보다는 ‘연봉 잘 챙겨줄게’에 더 큰 배려와 존중을 느끼는 내가 삭막하고 메마른 사람일까? 나는 모르겠다.- P101
그렇다면 나의 이혼은 무엇의 실패일까? 나는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이건 가부장제의 실패다. 한 집안의 가부장제가 균열을 일으키다 무너진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이혼이라는 사건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이혼은 한 여성의 인생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결혼과 이혼으로 우리를 협박하고 옭아맬 수 있던 시대는 이미 붕괴되고 있다.
실패한 사람은 없다. 실패하고 무너지는 것은 오직 퀴퀴한 냄새를 뿜어내는 낡은 사고방식과 제도뿐이다.-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