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와 격분은 차츰 패왕의 고질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한왕 유방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풀이해 쓰는, 패왕이 보기에는 한없이 비겁하고지저분한 술책 때문이었다.- P12
말은 쉬워도 패왕이 팽월을 잡으러 떠나는 것 또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날랜 군사로 사흘거리도 안 되는 곳에 한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데, 어렵게 차지한 형양과 성고를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P19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환초가 패왕에게 물었다.
"오창은 누구에게 맡겨 지키게 하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패왕이 낯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곳은 한낱 곡식 창고에 지나지 않는 곳이 아닌가? 거기다가 하수를 끼고 있어 지키는 데 많은 군사가 필요한 성이 아니다.- P23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 자는 패왕과 그 나머지로 엄격하게 양분되어 있고, 모든 중요한 결정권은 패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머지 모든 장수와 병졸들은 패왕의 손발이거나 이빨과 발톱이요, 도구일 뿐이었다.- P24
이제부터 그대들에게 한나절을 줄 터이니, 성안의 곡식을 거둘 수 있는 대로 거두어 비어 있는 서문으로 떠나라. 곡식을 가지고 성고로 가면, 항왕의 명을 어기지는 않은 셈이라 그대들의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P30
역이기가 제풀에 달아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신은 삶겨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제왕으로 하여금 스스로 한나라의 동쪽 울타리 노릇을 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게 만들겠습니다!"- P40
"그렇다면 선생이 보시기에는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것 같소?"
제왕이 이번에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제야 역이기도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반드시 한나라와 우리 대왕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P49
한신은 역이기가 제왕을 달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좀 더 군사를 키우고 조련할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다고 보아 기꺼이 한왕의 명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역이기가 정말로 제왕을 항복시켜 자신이 할 일을 없애 버리니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