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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자 행성

 

임상수 <오래된 정원>(2007)

 

약 한달 전 쯤이었나. 그날 작은 모임이 이 있어 새해 들어 처음 술을 했다. 양은 백세주 몇 잔에 불과했지만.. (맘이 힘드니 근래 술맛을 잃었다^^;;)  학교 앞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학사주점의 분위기 때문인지, 요 며칠 계속 이어진 감상 때문인지 돌아오는 길, 남의 집 대문에 붙여진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행사 포스터가 눈에 띄어 떼 오는 치기를 부렸다. 이미 그 며칠 전 토요일 그의 모교에서 치른 행사였다. "박종철이란 이름..", 그것은 내게 87년이고, 고교 시절 목격했던 부산 거리의 함성, 다시 지울 수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뭉쳐진 기억으로 이어진다. 여하튼 나는 추모제 소식을 부산 지역 뉴스를 통해 알았고, 우연하게도 같은 주 일요일, 남편과 함께 <오래된 정원>을 관람했었다.


씨네21에 의하면, <오래된 정원>은 임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들, <바람난 가족>과 <그때 그 사람>과 함께 한국 현대사 3부작을 완성한다고 한다. 내가 그의 영화 전부를 보지 않았기에 임상수의 영화를 결산하거나 할 맘은 없지만, 그의 전작들은 한국 사회의 변화된 시대정신을 읽으려는 자의식으로 가득하다 .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성과 결혼이라는 습속에 대한 희화화와 여성들의  반란(?)에 대한 기대를, <눈물>은 소위 주변인들에 대한 기성의 시선과 그 어긋남이 만드는 소통불가능을 직접화법으로 보여주려 하고,  <바람난 가족>은 일부일처제의 위선을 소재로 한국현대사의 뒤엉킨 이중성들( 그 현실과 균열을), <그때 그 사람>은 합리(rationality)가 부재하는 시절, 기억은 블랙코메디로서만  전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식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순전한 내 주관적인 평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절, 그는 <오래된 정원>을 기웃거렸나?   


나는 영화를 만든단 소식을 접했을 때도, 막상 영화를 보면서도, 그리고 씨네21의 인터뷰를 보면서도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나는 위에서 "왜..기웃거렸나?"고 표현했다. 듣기 따라서는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린다면 너무 정해진 순서를 밟아가는거 아닌가 하는 삐딱한 시선이 있었나 보다.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소설로 <오래된 정원>을 보지는 않았다. <손님>이 낫다는 중평을 따라 그건 읽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손님>을 영화로 만들 능력이 없나 하는 답답함이 들어 아일랜드 이야기엔 좀 심드렁했던 것 같다. 각설하고, 왜 하필 <오래된 정원>인가? 씨네21-585호(이래 저래 많이 갖다 쓰고 있는 585호는 년초 어딜 다녀오면서 버스터미널에서 정말 오랜만에 구입했던 인연(!)이 있다^^)에서 임상수는 "시대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물결 속에 휩쓸리며 헤엄쳐가던 하찮고 가냘픈 개인의 나날을 통해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는 황석영의 이야기를 전한다.

 

황석영 선생이 이 소설을 구상한 것은 독일의 윤이상 선생 댁에서였다고 한다. 비틀린 역사에 의해 내몰린 윤이상이 망향의 슬픔으로 관현악 조곡 <뤄양>에서 태곳적 평화로운 고향을 꿈꾸었던 것처럼, 황석영도 감방에서 냉전과 분단을 살아온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가상의 유토피아 "갈뫼"를 꿈꿨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와버린 낡고 버려진 과거 속에서 말그대로 어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미처 다 살피고 못한 기억 속에서 현재의 암담함에 대한 어떤 가느다른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섣부른 짐작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실 직접 소설을 잃어야만 확인될 수 있지 싶다).

 

그 두사람, 윤이상과 황석영에게  임상수는 어떤 반향을 일으켰나? 임상수는 적어도 내가 짐작하는 바에 의하면, (그리고 리뷰의 내용도 대체로 그렇지만) 소설과 달리 과거 운동권의 집단성과 한윤희의 개인의 시간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장소에 서려 한다.  한윤희는 영화 속 인물일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운동권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며 늘 함께하는 개인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은 과거의 오현우를 받아주었고, 사랑했고, 기다려주었고, 현재의 딸과의 대면을 통해 다른 시간의 가능성의 싹을 틔어주게 된다. 

그래서 "오래된" 정원은 오래되었지만 계속 새로운 계절들 속에서 "정원"은 가꾸어질  것인가?  임상수는 이제 어떤 정치적인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과거의 운동권이 꼭 다 망각해야 하는 존재들인가 하는 물음을 가졌던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의 임상수의 화법에 너무 편견을 가졌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게 딜레마인 건 맞다. 거대한 담론보다 개인에 집중할수록 정치적인 힘은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그런데 그렇게 아직도 정치적인 힘으로 하고 싶은 게 있는 건가? 한국 현대사 3부작에는 쿨한 태도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고 개인보다는 사회 전체와 이야기하려는 시도였다. 사실은 이런 영화를 보고 즐기도 토론하는 행위 자체도 어느 면에서 원자화되고 개인만 남은 삶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 것 같다." 

 

 

P.S)1. 사실 소설은, 아는 선생님이 어떤 사이트에 올린 브레히트의 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슴 저릿한 슬픔과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겹쳐 깊은 울림을 주었던 그 시가 다시 생각난다.

 

너희들은 어디로 날아가느냐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누구로부터 떠나왔느냐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이 함께 있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조금 아까부터
그러면 언제 그들은 헤어질 것이냐
이제 곧
Wohin ihr?
Nirgendhin.
Von wem davon?
Von allen.
Ihr fragt, wie lange sind sie schon beisammen?
Seit kurzem.
Und wann werden sie sich trennen?
Bald.

 

P.S)2. 그런데 영화 본 날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어 섭섭했다. 극장이 반 정도 찼던 것 같다. 운동권이었고 이러저러한 사건에 연루돼 감방 경험도 했던 남편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화라는 게 왜 이 모양이냐는 억울한 감정이 치밀었다(내가 뭘 했길래? 웃기네!). 제대로 됐으면 박종철 이한열 등등의 분들이 국민적 영웅은 못 돼도 뭔가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이런 게 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는 아직 진행중이라면 너무 비약일까? 

 

**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은 소비에트 영화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의 영화 제목에서 가져왔다. 

*이 글 마치기 전, 마침 최근 오마이에 실린 황석영선생의 글에 대한 반론이 있단 얘길 듣고 함께 올린다.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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