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추천하며
(참고: 이 글은 어떤 책에 써준 원고인데.... 기억력이 영.....)
상처가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몰살시킨 홀로코스트의 기억, 단추 하나를 누르는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몇 만 명을 일초에 잿더미로 만드는 원자탄의 기억, 이것이 너무 거창하고 먼 나라의 사건이어서 나 지신에게는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그렇다면, 가까이 다가와 보자.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형제가 총부리를 마주 겨눈 육이오의 기억, 제주 4.3사건, 거창양민 몰살사건......그리고 5월 광주.
상처를 상처로 두고 달력의 장을 넘기는 것으로써 우리는 이십세기를 졸업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주 그렇게 한다. 과거를 과거로 파묻어 버림으로써 새 시대를 열 수 있다고 믿는다. 나쁜 기억에 대해서는 잊는 것이 상책이라고도 말한다. 더구나,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라면, 저질러진 모든 폭력을 권력의 유지를 위해 필연적이었다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준다. 어쨌거나, 그것은 "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추천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렌트가 바로 우리 세기의 상처들에 정면으로 다가간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며, 그 상처가 결코 나와는 무관한 어떤 조직이나 집단의 행위가 아닌, 나 자신의 책임과 의무가 깊이 연루된 인간적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이다.
아렌트의 도움을 빌어, 나는 "인간의 조건"이란, "어머니인 지구"에서 살며, "활동을 통해 유한한 생명을 지속"하고, "말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이기 위한 조건에 다름 아니다.
이 세 가지의 인간 조건들이 위기에 처한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이며,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그 위기가 초래된 이유와, 그를 극복하기 위한 토대로써의 인간의 능력을 분석하는 데 바친 책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은 활동함으로써 세계내 존재로서의 자기자신을 구성해 간다. 이 활동은, 노동, 작업, 행위의 삼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노동이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물적이고 자연적인 요구에 대응하는 활동이며, 작업이란 인공물의 창조를 통해 세계를 의미심장하게 만들기 위한 활동이며, 행위란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제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활동이다. 따라서 이 세 단계는 점차적으로 의미심장하고 고상해지는 일련의 과정으로써,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작업을 통해 의미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고, 행위로써 인간공동체를 이루며 마지막에는 사유를 통한 관조적 삶이라고 하는 인간의 최고의 성숙단계에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실제로 최근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은, "지구로부터 우주에로의 탈출"과 "세계로부터 자아 속으로의 도피"라는 이중적 소외였을 뿐이며, 그러한 소외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노동"하는 인간의 승리라고 하는 사건이었다. 지금 우리가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 "노동'이란, 근대가 자체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며, 그 배경에는 자연과학의 발달이라는, 지극히 탈정치적인 것처럼 오해되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아렌트는 역설한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자연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해방시켜 왔지만, 노동 그 자체에 대한 신성화로부터 인간이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막상 노동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비로소 도래하였음에도, 인간은 행위를 통한 공동체의 형성에로 나아가지 못했고, 그 결과는 전체주의의 도래라는 참담한 현실일 뿐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전체주의는, 둘다 인간을 도구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도구화의 결과로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조건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유리되어 가고 만다. 아렌트의 말대로, "반드시 신 자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인간의 아버지인 신의 거부로 시작했던 근대의 인간해방과 세속화는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인 지구를 거부하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로 끝이 나야만" 할지도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미래란 대단히 가변적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미래는 정치적인 합의에 의해 결정될 사안이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자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에 실제로 일어난 "노동하는 인간의 승리"라는 사상을 추적함으로써, 아렌트는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의 회복과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야말로 삶을 인간존재로부터 소외시키는 기술문명을 극복하는 길임을 주장한다. 개별적 존재인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이상 제도와 기술의 도구가 아닌 행위의 주체가 된다면, 우리가 봉착한 이 세계의 사악함이란 결코 해결 불가능한 운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왜 <인간의 조건>에 대해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고찰이 아니라 이렇게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했는가?
그것은, 한나 아렌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하는 악의 문제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기자신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태인 지식인으로써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의 비극이 자기자신의 실존적 위기라는 것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답변은, 다른 유태인들과는 달리 이십 세기의 인간이 직면한 악의 문제가 결코 특별히 악한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이 자신의 본성에 내재한 조건들을 역사적으로 변형시켜 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취재하면서 아렌트가 봉착하게 된 "악의 평범성"이란 이러한 깨달음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다.
지나간 근대의 기술적 발달은 개인이 세계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해 버렸고,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이 결과로부터 소외되어 버린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적극적 반성의 결핍--아렌트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자면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은, 근본적으로는 수식과 기호로써도 전달가능한 과학기술로부터 기인한 정치적 위기이며, 그에 대한 무비판의 결과이다. 결국 "말"의 소외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의 이러한 특질이, 인간이 잠재적으로 다른 인간에 대한 공격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감동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다.
실제로, 아렌트의 저작이 가장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이 바로 악의 평범함에 대한 주장이다. 아이히만이나 히틀러가 특별히 더 악한 종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견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광주를 생각해보자. "폭도"와 "살인자들"의 집단이, 사실은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라고 하는 사실 앞에 당혹해 본 적이 없는가? 나아가 "질서와 치안 유지"를 위해 "발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직장에서는 믿음직한 상사라는 모순을 어떻게 우리가 용납할 것인가. 더 적극적으로 나는, 왜 나는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내가 실제로 고통받았던 것은, 절대로 나와는 무관한 타자들의 행위에 내가 얼마만큼 연루되어 있으며, 얼마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일정부분 남의 일로 여기고 애써 밀어둔 홀로코스트라는 악이, 바로 내 민족의 한 복판 광주에서 유사하게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를 엄습한 것이 바로 그러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서구 기술의 도입에 의한 졍제발전이라는 우리의 근대화가, 광주라고 하는 폭력으로 귀결된 것은 결코 특별한 실수가 아닌 기술에의 맹종이 낳은 피할 길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인간으로서의 사유능력을 조직과 기술에 반납해버린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평범한 악"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 정치적으로 용인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고 제2, 제3의 광주, 제2, 제4의 코소보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나 아렌트는, 군사독재와 5월 광주를 거치고 나서 인간과 시대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던 젊은 여성인 나에게, 비슷한 고민과 상처를 안고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 않으려 애쓴 그 노고로써 너무나 커다란 가르침을 준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