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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마음의 그물
인삼밭에그아낙네  2025/07/27 00:15
  • 둘도 없는 사이
  • 시몬 드 보부아르
  • 17,100원 (10%950)
  • 2024-05-25
  • : 1,420

'둘도 없는 사이'가 서양식 표현은 아닐 것 같다는 근본 없는 의심을 하며 표지를 확인하니 원제가 'LES INSEPARABELES'다. 프랑스어 직역은 '떨어질 수 없는(분리할 수 없는)'.


자전적 소설 『둘도 없는 사이』의 실비는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는 자자(엘리자베스) 라쿠엥의 또다른 자아다.


자의식 강한 9살 실비와 새학기 짝으로 등장한 앙드레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되면서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성장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단순히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고 억압적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토론을 했고, 항상 우리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곤 했다. 오늘은 아주 실제적인 일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 안에 있는 완고한 믿음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너져 내렸다. (pp.168-169)

그렇고 그런 흔한 여자아이들의 우정에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여자아이들의 우정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담하며 재기발랄한 여자아이들을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내용으로, 기성세대가 공고히 구축한 교육은 형식으로 억압하는 당시 풍토다. 한 예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것을 계급의 결과로 인식하는 선민의식이 20세기 초 프랑스 소도시의 풍경이라는 사실이 의외롭다. 프랑스는 시민혁명과 인권선언의 나라가 아닌가. 일종의 '프랑스 너마저도'하는 배신감이랄지.


삶의 내용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웠단들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그 자체로 미완이다. 그리고 죽은 이가 남긴 미완의 영역을 채우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아마도 뇌수막염으로 추측되는 앙드레의 죽음은 사건이라기엔 느닷없고 사고라기엔 지나치게 비극적인데, 선택을 할 수 없는 선택으로 내몰린 앙드레가 고열에 시달리는 몸으로 연인의 아버지를 찾아가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장면은 이것이 살아있는 앙드레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에서 몹시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잔상을 남긴다. 더 큰 불행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조차 자신의 신에게로 도망치는 비겁한 부모다.


갈라르 부인은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는 도구들이었을 뿐이야." 갈라르 씨가 부인에게 말했다. (p.189)

당사자의 의사를 배제하고 결혼- '짝짓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지드의 표현처럼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을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도식화시켜 집단에 강제 편입시킴으로써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확인받고자 하는 기성 질서의 권력은 또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누구도 자신의 도덕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것이 자식,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집단과 개인 간 헤게모니 쟁취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의 아포리즘 '목적지는 있지만 경로가 없다. 우리가 경로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를 빌리자면, 실비와 앙드레는 부모와 학교와 사회가 선의로 포장해 그들에게 내민 꾸러미가 정직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정의할 단어를 몰라 망설이고, 경로 이탈을 두려워한 아이들이 망설이는 사이 기성세대의 질서가 앙드레를 집어삼켰다고 할 수 있다. 실비 입장에선 둘도 없는 사이였던 앙드레를 빼앗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장소설이겠거니 하고 첫 장을 열었던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일종의 고발문학으로 다가왔다.


자자에게


오늘 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네가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일까? 이 이야기를 너에게 바치고 싶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여기서 네게 문학적 기교를 통해 말을 걸고 있는 거지. 게다가 이것은 너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일 뿐이야. 너는 앙드레가 아니었고, 나는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 실비가 아니었잖아.


시몬이 원고를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고 다듬었던 심정을 어쩐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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