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늘 가진 자의 편이다. 권력의 편이다. 권력이 그 모습을 바꿔왔을 뿐이다. 그건 폭력이었고 군부였고 고문이었고 이젠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우리 역사 가운데 어느 한 때 민중이 가진 자가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민중은 가난에 헐떡이고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끈질긴 삶을 이어왔지만 권력이 회유하고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면 그걸 믿었다.
“저번엔 그 녀석이 어찌나 화를 돋우던지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했지. 뭐, 다 자백하겠다고? 그래놓고 또 뭔가 숨기려고? 그까짓 거 뭐 중요하다고 입다물고 있는 거야? 안돼! 넌 취조가 더 필요해. 내게 필요한 건 그따위 시시한 정보만이 아니야. 너의 완전한 항복, 너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필요해! 그놈을 칠성판에 올려라!”
운동권의 마지막 학번 허무성은 수배를 피해 잠수를 타다 아버지의 병이 위급해진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다 급작스럽게 잡혀 지하 취조실로 끌려간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 ‘회사’에선 자백도 필요 없다. 무작정 고문을 하고 또 한다. 완전하게 인간을 파괴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최대한 심어 다시는 용기를 갖지 못하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게 만드는, 완전한 탈바꿈을 하려고 한다. 한때 열렬한 운동권이었던 허무성은 친구들만 넘긴 배신자가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생을 포기한 사람이 된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문자의 편이 되는 수밖에. 그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삶을 산다. 술로 견디며.
“고문을 독하게 당한 직후, 고문자에게 얻어마시는 술맛보다 더한 쾌락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거야. 이 술맛의 기억은 낙인 같아서 평생 잊지 못하지.”
그는 고문자가 보내준 유학을 다녀오고 그가 주선해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하지만 그는 늘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산다. 타락의 도시, 서울에선 황사가 끊임없이 그 혀를 날름거린다. 이젠 박정희의 공포가 아니라 서태지 같은 아이돌이 통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비주얼과 엔터테인먼트 시대와 함께 성장한 신세대 대중은 전 세대가 온몸을 바쳐가며 얻어낸 자유를 소비의 세대, 상품이 범람하는 신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로, 세계화로 바꿔버렸다.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한때 크게 번창했던 옛 왕국 누란을 삼켜버린 그 가없는 모래바다, 모든 것이 죽고 모래폭풍과 인광들만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었다. 폭풍이 몰아쳐 거대한 바퀴 모양의 깊은 궤적을 파놓으면 흰 뼈들이 드러나고, 밤에는 무수한 인광들이 불티처럼 날아다녔다.’ 모래바다는 어디에나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고문자가 떳떳한 프락치인 국회의원이 되어 진실을 왜곡하고 민중을 호도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어떻게든 솟아올라보려고 허무성은 학생들과 토론을 하고 눈을 뜨게 하려 하지만 이미 소비 자본주의의 달콤한 맛을 본 대중은 자신들이 눈을 뜨고 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용미의 그라피티가 살아있다. 무언의 저항의 몸짓인 그라피티는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관주의자라는 작가의 마지막 말은 그래도, 그래도, 우리 안에 희망은 있다는 긍정을 품고 있다.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