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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프랑수아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최근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두툼한 평전이 출간되어 살짝 흥분시키는 가운데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까지 열린다고 한다. 그를 좋아하는 시네필들이라면 '신경안정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제를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고 뒤이어 평전에 관한 정보들을 이어붙이도록 하겠다.  

국민일보(06. 06. 28) 누벨바그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프랑스문화원과 동숭아트센터가 ‘시네 프랑스’ 네번째 시리즈로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연다. 다음달 4일∼8월29일 매주 화요일 저녁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트뤼포 감독의 대표작 9편을 만날 수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세계적인 거장이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란 뜻으로 전형적인 영화 문법에서 탈피해 줄거리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는 ‘작가주의 영화’를 주창했던 흐름이다. 누벨바그 이후 영화의 개념이 바뀔 정도로 세계 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트뤼포는 1940년대 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에서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등 영화 동지들을 만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아래 사진에서 앞줄 왼쪽이 트뤼포. 맨뒷줄에는 안경을 쓰고 있는 고다르와 샤브롤의 모습이 보인다.) 



-1954년 영화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에 발표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ema Francais)’은 프랑스 전역에 누벨바그를 불러 일으키는 토대가 됐다. 이 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영화를 독창성이 결여된 미적 침체상태로 보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미적 가치기준을 마련했다. ‘작가주의 영화’의 탄생에 이론적 뒷받침이 됐다는 점에서도 영화사적 의의가 있다.

-트뤼포는 1959년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로 장편영화에 데뷔했다. 장인이자 영화제작자였던 이냐스 모르겐스턴이 “그렇게 잘났으면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하자 직접 영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트뤼포는 이 영화로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 역시 예술적으로는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세계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트뤼포는 이후 <400번의 구타>의 주인공 ‘앙트완 두아넬’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연작 시리즈 <앙트완과 콜레트> <훔친 키스> <부부의 거처>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20여년간 열정적인 영화작업을 계속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의 대표작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이웃집 여인>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 외에도 <마지막 지하철> <부부의 거처> <두 영국 여인과 대륙> 등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선보인다(*대표작 중 하나인 <쥘과 짐>이 빠진 것이 특이하다. 다들 봤을 만한 영화라서인가?). 



<상영작 목록>
- 7월4일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1977)’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11일 ‘400번의 구타(1954)’ / 전체 관람가
- 7월18일 ‘이웃집 여인(1981)’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25일 ‘마지막 지하철(198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일 ‘훔친 키스(1968)’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8일 ‘부부의 거처(197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5일 ‘두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1971)’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2일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9일 ‘사랑의 도피(1978)’ / 15세 이상 관람가

그리고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의 10번째 책으로 출간된, 세르주 투비아나, 앙트완 드 베크의 평전 <트뤼포>(을유문화사, 2006). 원저는 1996년에 출간된 'Francois Truffaut'(갈리마르, 1996)이다. 번역본의 분량이 796쪽이니까 현재로선 결정판이 아닐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트뤼포는 생전에 여러 차례 자서전을 기획했으나, 본격적인 자서전 집필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그가 수집해 둔 자료만 보존되어 있는 상황이다.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은 52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52편의 작품, 동료들의 증언과 트뤼포의 일기, 메모,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사적 자료를 토대로, 트뤼포의 후배 영화인들이 집필한 책이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비행 소년으로 낙인찍혀 불행한 성장기를 보냈던 트뤼포는 단절된 외부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위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수백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예술가들의 오만함에 조소를 보냈으며, '400번의 구타', '훔친 키스', '쥘과 짐', '아메리카의 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같이 '나'에 대한 영화, '삶을 찍는' 영화를 만들며 세계영화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하면, 이 전기는 그의 '입지전'이기도 하겠다.

 

 

 


"상처를 남긴 성장 과정, 히치콕, 혹스, 르누아르 같은 거장들에 대한 숭배와 교류, 영화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연출의 비밀들, 시네필들의 우정, 연애와 불륜,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의 방황을 비롯하여, 트뤼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회의 지적인 분위기, 누벨바그 세대의 형성 발전 과정, 1968년 5월의 칸영화제 풍경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풍부한 사진과 트뤼포의 모든 영화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필모그래피가 함께 실려 있다."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시네필 평론가 정성일은 "이 책만은 정말 번역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왜냐하면 매일 밤 나만 몰래 침을 발라가면서 페이지를 넘기며 트뤼포에 대한 사랑을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추천의 글에 적었는데, 그의 기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로선 유감스럽겠지만, 애호가 수준의 독자들에겐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도 몰래 침을 발라가며 얼른 읽어보도록 하자...

06. 06. 28.

P.S.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관련칼럼을 보충하는 의미로 옮겨온다. 내가 가보지 못한 트뤼포 영화제의 후일담도 곁들이고 있어서 읽어봄 직하다.

필름2.0(06. 07. 21) 트뤼포, 영화광의 초상

-7월 4일 오후 7시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영화제의 개막행사가 열렸다. 8월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상영될 9편의 트뤼포 영화 가운데 첫 번째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가 상영됐다. 이 개막행사는 최근 출간된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앙트안 드 바에크, 세르주 투비아나 공저, 한상준 역, 을유문화사)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것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역자 한상준 씨가 스크린 앞에 나섰다. 인사말 대신 그는 모 월간 음악잡지 기자로 일했던 1984년 당시 트뤼포의 부음 소식을 듣고 썼던 편집후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한 젊은 영화광이 선배 영화광의 삶과 죽음에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 성격을 띤 그 글의 마지막은 트뤼포의 죽음과 더불어 영화광의 청춘기도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이 모두 한상준 씨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존경하는 감독의 평전 번역을 손수 맡은 외국의 영화광이 보여준 헌정의 표시로는 최상의 것이었음을 누구나 인정했을 것이다.

 

 

 

 

-한상준 씨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저널리즘과 학계,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꾸준히 활동했으며 우리끼리 영화 내공을 따지면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인물이다. 그는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번역하기 위해 프랑스판과 영어판, 일어판을 두루 참고했는데 역자의 완벽주의는 출판사 측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의 손을 거쳐 깔끔하게 번역된 책은 8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세부적인 구성과 묘사력 면에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저자들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트뤼포의 삶은 영화에 비해 덜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훨씬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는 감옥 같은 학교와 학교 같은 집을 왕래하며 부모의 정을 거의 받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고 결핍된 애정을 스크린에 투사해 거기에 자기 삶을 바쳤다. 그의 구원은 오로지 영화에만 있었다. 그는 인생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드는 일과 영화를 비평하는 일과 영화인에 관해 말하는 일에 자기 삶의 상당수를 바쳤다.

-대체로 이런 영화광의 삶은 경멸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광이야말로 인생의 실상을 모르는 바보라는 경구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영화광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영화관에서 배우지만 영화관은 인생을 정직하게 가르쳐주는 장소가 아니다. 영화는 환상이며 꿈이며 도피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관은 현실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해방구이며 실제 삶의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 평전에 실린 실제 트뤼포의 삶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그런 고통스런 긴장이다. 이를테면 연애에 관해서도 트뤼포는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연애와 자신의 실제 삶에서 추구하는 연애의 경계를 곧잘 허물고자 했다. 영화에 빠져 살면서 실제 인생을 영화의 그것과 닮은꼴로 만들려 시도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경계 허물기는 쉽지 않은 것이어서 이는 트뤼포의 전체 삶에 예기치 않은 긴장과 혼란을 초래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의 첫 번째 작품으로 상영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는 그런 트뤼포의 삶의 형식을 잘 요약해주는 영화였다. 아주 오래전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전성기를 지난 감독의 주책스런 상상력의 발현이라고만 여겼던 영화가 이번에 다시 보니 특별한 정취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결혼하지 않은 채 숱한 여자들과 연애하는 것에 전력하는 한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쓸 때 다른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책의 제목을 바람둥이라고 쓸 만큼 이 남자의 삶은 부도덕하다. 특별히 잘나서 주목할 만한 매력이 없는데도 숱한 여자들을 매혹시킨 이 남자의 비밀이 영화 속에서 명쾌하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형의 삶이 주는 긴장의 중독성이랄까, 하는 것에는 어렴풋이 공감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베르트랑 모란은 각양각색의 여자들에게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백화점에서, 세탁소에서, 렌터카 사무실에서,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집 근처 상점에서 자신의 눈길을 뺏는 다리를 지닌 여성에게 돌진하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여자들의 다리는 지구의 모든 방향을 측정하면서 평형과 조화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 컴퍼스'다.

-한 정신 나간 남자의 일대기를 다룬 듯한 이 영화는 기묘한 종교적 열정으로 승화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죽어가면서도 간호사의 아름다운 다리를 보고 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려 애쓰다가 쓰러지는 베르트랑 모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의 이 영화에 관한 대목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에서 외제니의 아버지가 사망 직전에 사제의 금제 십자가를 낚아채려 애쓰는 묘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에서 베르트랑 모란의 자전적 소설의 가치를 알아본 책 편집자이자 마지막 애인이었던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이 자기도취에 빠진 구제불능의 남자가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비상한 혜안을 지닌 사람임을 인정한다. 이는 베르트랑의 영혼이 어떤 관습의 고정성이나 일상의 무감각에도 갇히지 않았던 열정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과 짧은 연애를 즐기면서 그가 자신의 가슴을 만질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는 관계의 긴장을 버텨내는 열정은 이 책에 따르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삶에서 줄곧 염원하던 가치와 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삶이 마냥 행복할 리는 없었다. 성장기의 자전적 체험을 다룬 <400번의 구타>로 성공하면서 겪은 부모와의 불화에서부터 아내와 딸들과 누린 일시적인 평화와 장기적인 부조화의 갈등도 그렇고 영화를 찍을 때 누린 공동체적 친밀감과 영화가 끝난 후에 느끼는 이별의 상실감 같은 것들이 그의 삶과 영화에선 늘 반복된다.

-이번 영화제에서도 상영되는 트뤼포의 또 다른 후기작 <이웃집 여인>에서 오랜만에 이웃으로 재회한 남녀 주인공은 젊은 시절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자신들의 열정을 되살릴까 말까 한동안 고민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마침내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을 분출시켜 그들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여자는 남자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사랑의 절정기에 죽음을 맞는 이 돌연한 결말은 인생의 충만한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지극한 절망의 표현이다(*언젠가 TV에서 본 영화이다. 제라르 드파르디유 주연). 영화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종의 시체애호증처럼 필름이 마모될 때까지 우리는 스크린 속 꿈의 실체를 거듭 음미하고자 영화관을 찾는다. 비디오와 DVD로 매체가 호환되는 현대에 그런 영화광의 매혹은 점점 과거의 것이 돼가고 있지만 유한한 실제 삶과 달리 실제 삶을 모방한 이미지는 불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트뤼포의 영화적 스승이기도 한 평론가 앙드레 바쟁의 명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영화는 현실에서 되살릴 수 없는 일종의 시체와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불멸성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트뤼포의 삶과 영화는 바로 그런 삶의 불가능한 충만함에 대한 거듭된 시도이고 열정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트뤼포는 프랑스 영화계의 기린아가 되기 위해 엄청난 야심을 불살랐던 젊은 시절부터 영화계의 중심부에 오르게 된 장년에 이르기까지 숱한 권력적 행보를 서슴지 않았으면서도 그의 스승 앙드레 바쟁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극적인 삶을 살았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그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흥미로운 영화세계를 펼쳤으며 그것 이상으로 굴곡 많은 삶의 궤적을 보여준 한 영화광의 삶을, 스크린 안과 밖이 겹치면서 생기는 긴장과 열정의 충돌을 통해 상세히 묘사하는 역저로 누구에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06.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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