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세폴베다의 최신작이 아니라 가장 근래에 출판된 책이다. 이렇게 신작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옛날 작품들이 출판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세폴베다의 인기가 그만큼 높아졌나보다. 남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찌는 듯한 무더위, 광적인 축구 열기, 부패한 정치, 회복할 수 없는 경제, 다혈질적인 민족성, 고대 마야 문명의 근원지(그러나 너무나 슬프게 끝나버린 문명의 역사) 등이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점은 그들은 북반구와 반대편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에 근거하여 궤짝을 맞추어서는 안됨을 뜻할 것이다. 이 작품은 세폴베다의 대표작인 '동행' 과 '악어' 의 근간을 이루는 그의 행적을 경쾌하게 기술해낸 일종의 모노드라마인 셈이다. 혹은 더 넓게 세폴베다 자신의 인생 궤적과 자아의식 및 정신의 원류를 찾아가는 성찰인 셈이다.
제 1부는 정치적 역정의 시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치적 권위를 부정하고,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던 할아버지 덕분에 일찌감치 사회주의자가 되어서 정치 탄압을 받았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감옥 시절은 암울과 음울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인텔리 동지들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불행을 보다 더 발전적인 형태로 전환시킨다. 또한, 문체나 내용 자체도 무지막지한 수용소 생활을 비추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단 한 줄로 응집된다.
"나에게 어떤 긍지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곳의 인간 백정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잊지 않고 산다는 사실이다 "
2, 3부는 남미에서 생활과 남미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일상을 그려냈다. 진정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은 손이 닳도록 열심히 일하는 묵묵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야 한다 하는 강한 자의식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 한탕 거하게 놀면서 대자연에 동화되는 모습들이다. 가슴 들끓는 열정을 삭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지겹게 군부정권, 부패정권에 맞서서 싸우다 얻게된 부산물일 수도 있고, 타고난 체질일 수도 있다. 한 훌륭한 좌파작가의 탄생배경에는 하층계급의 수많은 평민들의 이런 묵묵하지만 강렬한 삶의 태도와의 만남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4부는 주인공이 드디어 스페인에 살고계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작은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스페인에서 좌파운동을 하다가 남미로 망명온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미에서 좌파운동을 하다가 다시 스페인으로 가는 순환을 그린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운동은 회귀되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 근원이었던 중심점에서 유일한 혈육과 상봉하는 과정은 그다지 감동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너무나도 생생하고 구구절절 하면서도 절제되게 묘사한 세폴베다의 문장력으로 인해 감동을 느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세폴베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삶의 의욕이 넘치게 된다. 언제나 방향감각을 상실해가고 있다 싶으면 세폴베다의 책을 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