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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unjuk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대히트중의 대히트를 쳤을 때
그 6권이라는 장대함 때문인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베스트셀러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둘 다 였는지 모르겠으나 어찌된 연유인지 쉽게 '개미'라는 책에 손이 가지 않았드랬다. 지금도 가끔가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곤 한다. "아니 개미를 안 읽었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한없이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개미에 대해 너무 많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냥 그런 우리나라에서 기이하게 인기 많은 작가(수려한 외모가 한몫 했으리라!)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 정도로 여기었었다. 그러나 주위에 광적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팬인 사람 덕택에 '타나토노트' 라는 이름도 알쏭달쏭한 책을 접하게 되었다(순전히 강제적인 측면이었다!).

1. 죽음에 대한 동경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라는 고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본다. 나는 7살 때 '나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명제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못 푸는 문제를 7살짜리가 뭘 알겠다고...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인 채 머릿속에서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얼마 후 석가모니의 위인전을 읽었는데, 석가모니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 심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면서 나는 내가 고민해오던 해답을 찾을 것만 같은 충만한 기대로 한 장 한 장을 넘겨나갔다. 그러나, 거기에 나와있는 답은 "석가는 결국 깨달았다! 이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해탈하였다!" 하니 뭘 깨달았나?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민의 답은 무엇이던가! 결국, 그냥 석가는 뭔지 모르겠지만 깨달았고, 나는 깨닫지도 못한 채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지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냥 누군가의 유전자를 간직한 채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해 탄생되고 진화된 '인간' 일 뿐이라는 결론을 이르렀다. 그렇다면 죽으면? 물리적으로 죽으면 끝이다. 윤회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의 부정을 거듭해왔다. 왜냐,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고민은 7살 때 심각하게 해본 걸로 충분하니까.

2. 죽음에 대한 상기
묻어두었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 낸 이 책은 죽음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주인공들이 죽음을 위해 탐사하는 내용이다. 죽음을 탐사할 것이 뭐가 있을까? 그들이 돌아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시작된 이 영계 탐사는 그야말로 상상력의 풍부함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집착과 탐구는 어렸을 적 호기심을 다시금 상기시켰고, 그에 대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식 결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결말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간에 천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을 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에 동화되게 된다. 이건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 기반한 과학적 분석을 갖추면서 특징 없는 주인공의 관찰태도 중심의 기술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혹은 동, 서양의 철학들을 아우르는 베르베르의 인생관이 매력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매트릭스 혹은 유체이탈
이상하게 그들의 영계탐사 과정이 매트릭스를 보는 듯했다. 신체는 누워있고, 정신(영혼이라 불리는) 은 다른 곳을 탐사하고 있다. 마치, 신체는 갇혀있고 이미지를 머릿속에 입력하여 다른 차원에서 행동하는 매트리스 주인공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달마 대사의 유체이탈 만큼 엄청난 것이 또 있으랴! 솔직히 나는 눈에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주의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하나의 전설이나 설화처럼 여겼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진지하게 소설의 주된 장치로 이용하는 베르베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몸은 그대로요, 마음은 블랙홀까지 갔다온다는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유체이탈 자체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4. 신비주의?
베르나르 베르베르같은 서양인이 보기에 동양사상은 정말 환상의 영역인가보다. 우리야 워낙에 서양사상에 익숙해지고 동양사상은 생활 속에서 많이 접하든 터라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 새롭다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쪽 고대사상들이 새롭다고 해야하나. 베르베르는 전 세계의 죽음에 관한 설화들을 집대성 한 듯 보인다. 그러한 방대한 설화들과 전설들은 이 '죽음' 탐사를 받쳐주는 하나의 가설이며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라마교의 교리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원래 라마교 신자인지 아닌지 모르나 주 핵심이 되는 원동력은 라마교의 정신세계이다. 물론, 유대교 랍비 역시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랍비 프레디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기 보다는 스스로 가르침을 터득한 이처럼 보이고, 라마교 신자 스테파니아는 라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표현한다. 아마, 라마교의 유체이탈 가설이 없이 이 소설의 전개는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5. 전체와 부분간의 상호 연관관계
네 명의 탐사 대원 중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인간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기는 하나, 모두들 그러한 불안정성을 '죽음' 탐사로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나서 우리 세계는 변한다. 죽음이 알려지고 나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종교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등 모든 폐해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들어 난다. 그런 전체적인 구조의 모순과 문제점들과 동시에 탐사 대원들에게도
불 완전성이 심하게 드러난다. 객체와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그들은 전체의 변화에 따라 하나씩 변해간다. 그것은 스테파니아의 입을 빌러 표현된다. "이렇게 무미하고 따분한 세상 속에서는 살아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너무나 역동적인 이 세계가 얼마나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특히나, 하루가 다르게 쇼킹한 뉴스로 신문을 가득 채우는 우리나라에 와서 산다면 오히려 무미건조한 평화로운 상태를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역동적인 변화로 인해 그래 세상은 이런 맛이야! 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럭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미세한 인간일 따름이다(도교주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변화되기보다는 여타 주변의 것들,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던 싫던 간에 우리 주변의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 브레송 처럼 모든 문을 쳐 닫고 살수는 없는 것이다.

6. 선과 악은 공존한다.
선과 악은 양면성이다. 이만큼 멋있는 명제가 또 있을까! 언제나 늘 주장하지만, 가장 악한 사람이 가장 선할 수 있고,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악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에는 절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이 천사가 될 수 있고, 천사가 사탄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선과 악의 공존은 스테파니아의 공격적인 테러로 이어진다. 선이 있기에 악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하기에 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7. 기억에 대한 강박관념
인간은 누구나 안 좋은 기억을 은밀하게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누구에 의해서도 공개되길 원하지 않은 기억. 그런 기억은 자기만 꼭꼭 숨겨서 간직되길 원하고, 가능한 지워지길 원한다. 그런 기억은 그러나 때때로 예고 없이 훌쩍 나타나서는 공연히 우울함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사라진다. 그런 안 좋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돌진한다면? 아마 엄청난 혼란과 괴로움을 안겨다 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보이지 않게 작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런 기억에 대한 공포를 우리는 언젠가는 맞딱드리게 되는가보다. 베르베르도 이런 인간의 보이지 않은 불안심리를 영계의 세계를 통해 표현해 주고 있다. 공포는 내 안에 있도다 라는 스쳐 지나가는 문구를 되새기게 해준다. 어쩌면 자아의 번뇌 역시 내 속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이거 역시 불교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 같다.

8. 씁쓸한 자본주의
천국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천사들은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 그래서 인간을 고용하지만 인간들은 돈을 받고 그들의 장부를 마음대로 조작한다. 결국, 돈 많은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면죄부가 생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 현실이 사실상 그러하다.
루턴의 종교개혁이 나오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돈을 많이 기부하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종교인사들이 퍼뜨린 말이겠지만..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현실 속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며칠 전 절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돈을 50만원 이상 기부하면 이름을 돌계단에 새겨드립니다. 라고 써있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50만원 기부한 사람은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다. 나는 부처님께 이만큼 돈을 기부했으니까 극락을 보장해주시겠지! 라고 마음을 먹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돈을 일정이상 기부하면 이름이라도 새겨주니 대대로 남기라도 하겠지. 이 어찌 루턴의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의 종교양상과 달라진 것이 뭐가 있으랴. 무슨 종교를 해도 기부금은 필수이고, 돈을 많이 기부할수록 대접받는 세상이거늘.

9. 나무가 되리라
인간은 자연과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이를 가장 강하게 믿고 있는 베르베르는 죽으면 나무아래에 묻어달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가장 속물적이었던 뤼생데르 대통령도 나무아래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계 탐사대장격이었던 라울은 환생하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 책을 다 덮고 나니, 동물 하나하나 식물 하나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게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힘인 가보다. 지극히 단순한 명제인 자연과 인간은 공존한다를 이렇게 환상적이고 방대하게 집대성할 수 있다는 능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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