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팔라닉 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Fight Club 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이다. 그때도 Fight Club 하면 척 팔라닉 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때의 Fight Club 은 그저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이었을 뿐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이다 라는 점때문에 영화를 보게 된 것이지만, 나중에 그게 소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까무러쳤다. 그만큼, 데이비드 핀쳐 색깔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는 스토리 라인이었던 게다. 그건 폴 오스터처럼 휴머니티적이지 않고, 필립케이딕 처럼 음울한 변형도 아니며, 레이몬드 카버처럼 재기 넘치지도 않는 그 무언가였다.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척 팔라닉의 성난 분출 혹은 몽유병 적인 기질의 발산이었던 게다. 그 이후에 척 팔라닉이라는 이름의 기묘함을 앞으로 한 채, 척 팔라닉의 세계에 흠뻑 빠지려 하였으나, 뭔가 다른 이질적인 감수성으로 그 의도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그리고 이상하게 왠지 척 팔라닉은 Fight Club 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역시도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는 Fight Club을 집어 들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척 팔라닉에 열광할까 하는 해답은 Fight Club 에 다 담겨 있는 듯하였다. 적어도 내가 왜 척 팔라닉을 열광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예전에 읽은 기타노 다케시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인간은 시계추와 같다. 극과 극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극도의 폭력적인 사람이 그와 반대되는 극도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닐 수 있으며, 천진난만한 사람 역시 극도의 폭력성이 깃들여 있다" 라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인간성 탐구는 시작되었다. 내가 본 저 사람도 시계추처럼 극도로 다른 모습을 지고 있을 지도 모르지..하는 심리감은 그 이후 줄곧 나를 지배해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주아주 악마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지하철을 타건, 버스를 타건, 사람이 꽉꽉 많은 곳에서 나는 이 사람들에게 Fuck you 의 시선을 날려버릴 만한 일을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해본다.(사실 자주 한다-_-) 그 Fuck You 의 시선이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지만.. 왠지 심의에 걸릴 것만 같아서 생략한다 -_-!
아무튼 평상시에 그런 상상을 늘 해왔던 터라(그런 상상이란 타일러가 하는 짓거리들과 비슷한 걸 말한다 -_-) 그런 것을 다중인격이라는 걸개를 가지고 끌어내는 척 팔라닉의 말발에 속된말로 뻑 가고야 말았던 게다. 평상시에 내가 꿈꾸고 고민해 왔던 두 가지를 다중인격이라는 장치를 발판으로 거침없는 문장으로 숨막히게 하는 글 스타일에 그야말로 '유레카' 를 외쳤던 게다. 아마 다음에 Fight Club 만을 위한 시간이 있을 터이니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인다..정작 오늘의 테마는 Survivor 였지..
그렇게 Fight Club 의 풍만한 가슴 벅참을 경험하고 두 번째로 Survivor 로 집어든다.
책을 읽을 때 원래 chapter 에 신경 쓰지 않고 보는 편이라, 그 책의 구성이 chapter 번호가 거꾸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거의 다 읽을 때 즈음 7이 나올 때 알았다.-_-;;
이 책의 구성은 시간을 처음에서 차곡차곡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내가 어디어디에 있지..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하면서 시작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의 화두
" 종교와 인간본성과 사회와의 관계? "
주인공은 크리디시 종교라는 흔히 일컬어지는 사이비종교의 집단 생활을 겪은 인물이다. 그가 받은 교육을 무장하고 이 사회에 내동댕이쳐진다.
수음과 섹스는 부도덕한 일이며, 알코올과 니코틴과 사탕 역시도 부도덕한 것이며, 매체 역시도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밖에 해면 안 되는 것들로 온 세상은 널려있다. 종교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제한을 가해준다. 그러한 것이 인간본성의 발로와 어떤 상충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라는 규율 속에서 하나의 인간본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사회화라는 것이 텐더 브랜슨 처럼 종교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우리는 굳이 '종교' 가 아니더라도 학교나 제도적 환경에 의해 또 다른 '규율'과 '법칙'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브르디외의 교육의 이데올로기나, 문화의 재생산 내지는 문화실조를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규정 지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무엇무엇은 알아야 하며, 무엇무엇은 하면 안되며 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그 사회가 지배계급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명령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다.
텐더 브랜슨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으면 견뎌내지 못한다. 학교다닐때는 선생의 지시에 따라고 직장에서는 상사의 지시에 따른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지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크리디시의 세상만큼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더욱더 무서운 세상이다. 장로들의 그릇된 잣대 속에서, 우리는 우리사회의 형성된 규율의 잣대 속에서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혹은 텐더 브랜슨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흘러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소름이 쫘악 끼칠 정도로 끔찍하다.
메트릭스속에서 기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가정 자체가 끔찍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채로, 이 사회의 틀 속에서 맞추어 살아야만 한다는 '현재' 의 모습 역시도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인 게다. 문제는 이러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각을 하지 못한다는 게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척 팔라닉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인 게다. 그리고 그의 강렬한 문체는 언제나 나의 지적 음핵을 자극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