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전에 -요시다 슈이치의 건조한 시선 -
요시다 슈이치의 많은 소설에서도 그렇듯 이 작품도 정처할 수 없는 어떤 인간의 괴리를 보여준다. 주인공 슌은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고, 무언가 하고 싶은지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나가사키라는 공간속에서 한 집안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 혹은 변해가지 않은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공감가는 점은 주인공의 객관적인 시선이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시선이 존재하는데, 하루키의 무관심하고 건조한 시선이 결국에는 ‘자아’로의 발현으로 이어진다면 요시다 슈이치의 시선은 ‘자아’의 발현보다는 주변 환경 또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림으로써 어떤 상실감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감은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도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작용한다.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것이야!” 때문에, 비슷한 무감각하고 건조한 시선이라 할지라도 요시다 슈이치의 시선은 좀 더 날카롭고 과감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항상 슬프게 만든다. 그것이 슬픈 이유는 과장된 몸짓이 없고, 군더더기 없는 삶의 리얼함을 그대로 체현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곳으로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리게 만들고, 결국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참담한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수많은 주인공들에 공감이 가는 이유는 특별한 열정과 열망이 결여되어 있는 채로 하루하루를 묵묵하게만 살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한다고들 하지만, 자신의 꿈이 무엇인가 명백하게 직시하고 그 꿈을 위해 달려 나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문스럽다. 인생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꿈을 어느 순간 찾기라도 하면 다행이 아닐까? 혹은 그 찾은 꿈이 주변 환경과 사회제반시설에 어울려져서 급가속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 역시 천만분의 일로 다가오는 행운아 정도가 아닐까 싶다.
2. 나가사키 그 지역의 거리감?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는 나가사키는 일본인이 아닌 타국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그런 외딴 변방쯤의 이미지가 개입된다. “도쿄는 어떤 곳일까?” 라는 막연한 상상 속에서 자신의 지역을 떠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청년기의 마음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뒤섞이면서 이루어지는 막연한 희망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에는 이 모든 환경만 바뀐다면 얼마든지 좋을 것 같고, 희망찬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떠남”에 대한 강한 집착 속에서 살아가곤 한다. 그러나 슌은 이러한 인지가 가능해지기 전인 초등학생 시절에 이미 막연히 떠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관념이 깊게 드리우져 있었다. 그렇지만, 소설의 뒷부분에서 나오듯이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란 말이지’ 라는 외침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지. 아무것도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주변의 끊임없는 관계들(인간관계이든, 사회와의 상호작용이라든지) 속에서 나 혼자 ‘결정’ 할 수 있는 완벽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긴 힘든 것이다. 그럼으로 고독은 더욱 깊어지고,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숨어들어가면서 자신을 점점 고립화시키고 만다. 그래서 슌은 결국 별채생활을 이어가는 남자가 되는 것이다.
3. 별채의 독립성 혹은 고립화
별채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의미상 별채는 안채와 분리된 공간, 즉 독자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별채에 거주했던 남자들은 안채에 드나들던 남자들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먼저, 자살한 데쓰야 삼촌,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야쿠자의 세계에 뛰어들지도 않고, 그저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머물다가 떠난 이구치, 그는 나가사키에 본거지를 두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간 사랑방 손님이나 다름없는데, 데쓰야의 작품인 고야의 ‘거인’을 모사한 작품을 알아본 유일한 남자이기도 하다. 이 자체로도 안채에 드나들던 남자들과의 개별성을 띄게 된다. 또한, 별채의 세계는 외부인과의 관계가 빈약한 상태로 내면으로만 침전된 채 고립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슌은 이쿠치를 따라 나가사키를 떠나려 하였지만, 그의 호탕한 웃음과는 달리 그는 그를 버려둔 채 떠나고 슌은 여전히 나가사키에 남겨지게 되는데, 이 후 성장한 후에도 떠나려 하지만 떠나지 못한 채로 있다가 대신 데쓰야 처럼 별채에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리면서 고립화된 채로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스스로의 ‘결정’ 에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빚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에 의해 ‘좌절’ 된 내면의 아픔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으며,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에 대해 ‘판타지(아무것도 하지 않고 독립된 공간으로의 고립된 생활)’의 형태로 투사된 듯하다.
4. 소실과 순환?
역자는 “‘별채’가 불타오르는 장면을 통해 순환하되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나선형 운동, 즉 한 단계 올라선 맞물림의 결과를 암시한다.” 고 해설하고 있지만, 소실로 인해 은밀한 자아의 공간(별채)이 사라진 것 같아서 씁쓸함을 느꼈다. 모든 것이 불탔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해야 하지만, 그 새로운 시작이 과연 희망적인 미래를 펼쳐나갈 수 있게 할지는 여전히 의문인 채로 말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찌되었든 지간에 과거로의 단절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목을 꽉 잡고 있던 관계들이 그나마 조금은 정리되었기에 앞으로의 전진을 기대하는 바이다.
5. 고야의 ‘거인’
고야의 ‘거인’은 인간 내면에 담겨져 있는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인데, 이를 그렸던 데쓰야 역시도 짓눌리는 삶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채 목숨을 끊은 듯하다. 미무라 가의 남자들은 데쓰야의 그림을 버렸고, 삶의 공포를 직시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혹은 공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인 듯 등장한다. 미무라 가의 남자들은 자신도 모른 채 다가오는 여러 공포들 속에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쿠치 만이 고야의 ‘거인’을 당당하게 걸어두는 배포를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삶에 당당한 채로 소설에 등장하는가를 간접적으로 표현해준다. 슌은 기억도 나지 않은 데쓰야의 모습을 그리는데, 마치 자신의 자화상인 듯이 그림으로 해서 데쓰야와 동일시되는 순환의 고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슌은 삶에 대한 공포를 ‘고립화’ 시킴으로 해서 내면을 가두는 법으로 대처하고 있다.
6. 나오면서 -
짓눌린 삶의 공포, 사회적 관계 작용으로 인한 얽힘, 결정의 부재, 방향상실, 회피와 고립화의 판타지, 이러한 것들이 소설<나가사키>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다만 동질의 문제점을 어떤 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가가 관건이다. <나가사키>에서는 소실로 인한 회피와 고립의 판타지라는 점을 잘라내고, 모든 과거로의 관계를 청산 한 채로 마감하였다. 과연 나는 삶의 공포를, 사회적 관계 작용에 대한 얽힘을, 결정의 부재를, 방향상실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 지 또 한 번 고민하게끔 하는 작품이며, 하나의 대안 점을 모색하게끔 하고, 또 다른 동질감을 느꼈던 작품이다